달력

52025  이전 다음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2017년 8월 1일, 18년 전의 무언가를 기념하며.



이상 징후



 불확실하고 몽환적인 기억. 눈을 감고 시간을 되돌아가다 보면, 형상은 흐려지고, 이 시간 속에 존재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어느 날, 어느 때에 운이 좋아서 이렇게 살아있는지도 모른다. 그 시간에 겪은 위기들이 뚝뚝 끊어진 프레임으로 움직인다. 그런 것들이 떠오르는 것이, 오늘이 중요한 날이라 그런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만, 가끔 그런 형상이, 내가 직접 겪은 것이 아닌 누군가가 경험한 장면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빠져들 때면, 어쩌면 지금 가장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이, 나의 기억이 아닐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날이 없으면 나는 존재하지 않았어, 그 말 속에 ‘나’는 내가 이해하기 힘든 경계에 있는 의미일 것이다. 정말 그날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에서 도대체 얼마나 달라진 채로 있을까.

 “다이스케, 어제 새벽까지 깨어있었는데 졸리지 않아?” 열린 가방 지퍼 사이로 치비몬이 얼굴을 내밀었다. 그래, 많이 바뀌긴 하겠네. 아주 많이.


 휴가를 보내는 철이 되면 시간관념이 갑자기 사라졌다. 오늘이 평일이던가. 저번에는 8월 1일은 주말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이제껏 1일이 어떤 요일인지 달력을 보기 전까지는 제대로 생각하지 않았다. 누가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지금까지는 기적에 가까운 일로 모두 만날 수 있었으니. 그날만큼은 주말 같았다. 세상은 평소와 같이 돌아가고 있어도, 마치 몇몇 사람들에게만 하늘과 땅이 뒤바뀌는 경험을 안겨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메모리얼, 그 단어를 뉴욕에서, 수 년 전 테러가 일어났던 그 자리에서 볼 수 있었다. 한 달 뒤엔 그 날에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추도하는 이야기가 다시 나올 것이다. 그날, 현장에 있던 사람들, 어딘가에서 무너지는 소리를 들은 사람들, 그 현장으로 달려가 잔해를 치우던 사람들, 그 옆에 있는 디지몬들. 나의 기억은 아니지만 미미 상에게 들은 이야기만으로도, 그 장면들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나는 그곳에 있지 않았음에도.

 “비행기 타려면 많이 남지 않았어? 뭐 할 거야?”

 “그러게, 갈 날이다 생각만 하고 그냥 막 나온 거라서. 시간이...... 아직은 오전이니까.”

 “졸려... 근데 나는 왜 가방에 있지?”

 “가방 안에서 자고 있어서 그냥 들고 나왔지. 나올래?”

 “응, 여기나 밖이나 덥기는 하지만...”

 반쯤 열린 지퍼를 열자 치비몬이 튀어나와 어깨에 매달렸다. 가방을 뒤지다, 언젠가 사놓고 까먹고 있었던 초콜릿 바 하나를 발견했다. 이곳에서 샀던 좀 큰 사이즈의 초콜릿이었다.

 “이걸 언제 샀더라. 좀만 있으면 다 녹아버릴 거야.”

 “그럼 그 전에 먹으면 되지!”

 치비몬은 포장을 뜯자마자 손에서 가져가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어제 많이 먹지 않더니, 가뜩이나 좋아하는 걸 보았으니, 그것 외에 신경 쓸 게 없을 게 분명했다. 남김없이 헤치워버리고 남은 포장지를 돌돌 뭉쳐서, 주위를 보다가 그냥 가방에 넣었다. 입에 묻은 게 아까운 듯 최대한 혀를 내밀고 있는 치비몬의 입가를 닦다가, 치비몬이 말했다.

 “다이스케, 바다나 볼래?”

 “바다라니...... 언제라도 볼 수 있는 게 바다인데.” “그래도. 도쿄하고는 많이 다르니까. 여기 올 때마다 그게 정말 좋아.”

 “그래, 그러자. 어차피 시간도 많으니까.” 하품이 크게 나왔다. 예정대로라면 도쿄에는 오후에나 도착할 테고, 피곤한 상태에서 사람들을 만나게 될 참이었다. 손으로 얼굴을 때리고, 어차피 비행기에서 자면 될 거라 생각한다. 바람이라도 맞다 보면 잠이라도 깨려나.

 

 

 “바람 좋다. 안 그래, 다이스케?”

 치비몬의 말에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받은 문자에 놀라 황급히 공항에 연락을 하는 중이었다. 비행기가 지연이 된다는 연락이었다. 아니, 결항이었던가. 도쿄로 가는 항공편만 그런 건 아니라고 처음부터 대뜸 들었다. 지금 예정된 거의 모든 비행기에 문제가 생겼다라.

 “그러면 대체편이 어떤 게...... 네, 그래도 오늘 밤 출발이라고요......”

 “다이스케, 어떤 일이야?”

 “하, 결항이라는데, 갑자기 어떻게 된지 모르겠어.”

 7월 31일, 오후로 넘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일본은 막 1일로 넘어가는 때. 이런 상황이라면 8월 1일 전까지는 도착하지도 못할 것 같았다. 예정을 빡빡하게 잡은 탓일까.

 “일단은... 다들 연락을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게, 올해는 비행기가 이러다니......”

 “8월 1일만 되면 하나씩 이상하지 않아? 저번에도 몇시간 지각했잖아.”

 “올해는 제대로 올 거라고 약속했는데, 이렇게 되다니......”

 “그나저나 어디 머물 곳은 있어?”

 “하... 또 신세지기는 그런데.”

 예정되었던 숙소가 이상하게 꼬이는 바람에, 하루 정도를 숙소 없이 지낼 뻔했다. 마침 월리스를 만났을 때, 여차저차 말을 해서 겨우 하룻밤을 집에서 보냈다. 급하게 한 부탁에 마음이 조금은 이상했는지 어제는 별로 자지 못했다. 전화를 걸어 연결될 때까지 기다리면서, 부끄러운 마음이 조금 들었다.

연락이 닿았고, 홀로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 사이로 월리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이스케? 뭐 놓고 온 거라도 있어? 오늘 급하게 나가던데.”

 “미안하지만, 몇 시간만 더 있어도 될까?”

 “뭐, 괜찮기는 하지만, 왜?”

 “실은, 비행기가...... 아, 가서 해도 될까.”

 “응, 아. 근데 여기 네 게 있는 거 같은데, 디터미널인가?”

 “그런가 보네. 어차피 가야했던 거구나.”

 “천천히, 천천히. 뭐든지 급하면 안 된다니까?” 전화기 너머 구미몬의 목소리가 들렸다. 알았어! 누가 그런데? 소리치자 작게 흥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치비몬, 가끔은 기분 나쁘지 않아?”

 “하나도 안 그런데?” 치비몬이 말했다

 “휴, 물어본 내가 바보지.” 오늘 한숨을 몇 번이나 쉬었는지 세기 어려웠다.

 

 

 

 “10시간이나 지연이면 좀 심각하긴 하네.”

 “갑자기 이러다니. 다른 항공편도 없을 줄은 몰랐어.”

 “이맘때면 하나씩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 같아. 아, 뉴스에도 나오네.”

 미국 동부에 있는 공항에 전부 문제가 생겼다는 내용이었다. 서부나, 다른 나라 공항에는 이상이 보고되지 않았다고 했다. 작년에 있던 일이 생각났다. 도로 신호가 완벽하게 엉망이 되어, 발로 구와 구 사이를 뛰어갔지만 모임에 1시간을 지각했었다. 그 전에도, 지나가는 뉴스에서 어디 중 하나 꼭 하나씩 발생하는 이상 징후를 본 적이 있었다.

 “저번에는 TV가 아예 먹통이었어. 이것만 그런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라디오도 안 되고, 방송이 아예 먹통이었다고 했어.”

 구미몬이 컵에 있는 얼음을 꺼내먹으며 말했다. 일본보다는 덜하겠지만, 뉴욕도 무더운 건 마찬가지였다. 변덕스러운 날씨라고는 하지만, 오늘만큼은 계절감을 되찾은 듯 뜨거운 날씨였다.

 “덥네. 도쿄도 이렇게 더울 텐데.”

 “얼음 먹을래?” 구미몬이 얼음을 손에 들고 말했다.

 “됐어, 물은 많이 먹었으니까.”

 “구미몬에게 너무 그러지 마. 놀리는 것도 아닌데.”

 “그래도...... 월리스. 어제도 구미몬 때문에 좀 힘들었다고.”

 “예전엔 별 말 없었는데. 그냥 타입이 안 맞는 거 아닐까?”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거지만......” 멍하게 TV에 나오는 화면에 눈을 집중하고 있다가, 어깨에 있는 치비몬이 머리를 만지며 말했다.

 “근데 다른 사람들에게 연락해야하지 않아?”

 “거기는 지금 새벽이라서, 전화 같은 건 하면 안 될 거야.”

 “그럼, 문자나 메일로 하면 되잖아.”

 “어떻게 써야 제대로 받아들여지려나......”

막상 누군가에게 보낼 지도, 어떻게 보내야할 지도 막막했다. 늦은 시간에 깨어있을 사람이 몇 생각이 났지만, 그래도 무언가 막막했다.

 “간단하게 보내면 될까. 비행기 때문에, 못 온다고.”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좀 생각해도 될 것 같아.” 월리스가 말했다. 방 안에는 몇 있지도 않았지만, 금방 어울리는 치비몬과 구미몬 때문에 어느 사람들로 분주한 공간만큼 분주했다.

 “이런 날씨에도 쌩쌩하구나.”

 “우리도 어렸을 때 그랬잖아. 무턱대고 중부까지 가기도 했고.”

 “아직도 기억나. 아, 그 알은 잘 있어?”

 “저기 있어. 아직 그대로라서 걱정이네.” 책상 한쪽에 놓여있는 알이 눈에 들어왔다. 분홍색 반점이 있는 누런 알. 떠내려가는 강에서 꺼냈다는 그 알은, 그 이후로 좀처럼 미동도 없었다고 했다.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누구도 몰랐다. 초코몬이기를 바라고 있다고 말했지만, 확신이 찬 말은 아니었다.

 “가끔은, 오늘 나타나는 이상 현상이 저 알에 나타났으면 좋겠어.” 월리스의 말이 조금 차갑게 느껴졌다.

 놀고 있는 치비몬과 구미몬을 보다가, 월리스가 다시 말했다.

 “8월 1일에는 다들 모이는 거야?”

 “응, 사실 그날은 그렇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 날은 선배들이랑 친구들이 디지털 월드로 간 날이니까.”  “구미몬과 초코몬이 만난 때가 언제였더라. 너무 어렸을 때라 날짜는 기억나지 않아.”

 타이치 선배와 히카리 짱이 코로몬을 만났을 때와 비슷한 때였을 것이다. 그때는 선택받은 아이들도 무엇도 없었고, 그 이후에야 하나둘씩 선택을 받았다고 했다. 그 날의 이상한 이야기가 오늘 일어나는 이상 현상의 시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곳에서 일어난 디지몬의 출현이 99년도에도 이어진 것이라고. 그렇다면 월리스는 99년도에 어땠을지, 다른 곳들은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했다.

 “99년도, 오늘은 어땠어?” 나는 물었다.

 “추웠어. 겨울보다 더 추운 날씨라서, 일어나자마자 감기에 걸리고 말았어. 그 바람에 집에만 누워있었어.”

 “며칠이나 누워 있었어. 월리스 이마가 그렇게 뜨거웠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아.” 구미몬이 말했다.

 “도쿄에서는 눈이 내렸어. 그때 눈이 온다고 밖에 나가서 구경하고 그랬었는데, 그 다음날인가 이튿날인가는 빅사이트에 가족들이랑 갇혀있었어.”

 8월 1일, 그 날 자체는 그렇게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다음날들은 또렷히 기억이 났다. 괴물의 습격, 그때는 이름을 모르던 공룡 위에 있던 사람......

 “그때 처음 봤던 거 같아. 내 우상을? 지금까지도 믿고 있는.”

 그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아직도 마음이 쿵쿵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언젠가 8월 3일 이후의, 나를 본 적이 있었다. 고글을 가지고, 타이치 선배 같은 사람이 되겠다고, 사람들을 지키고 싶다고 말했다. 아직도 무언가 잊어버릴 때마다, 나는 그 목소리를 다시 듣는다. 그 어리고 힘차던 목소리를.

 그 사이 하품이 나왔고 눈이 점점 감겨왔다. 금방 피로가 다시 쌓인 건지 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월리스는 방 쪽을 가리키며 조용히 말했다.

 “조금만 자. 시간은 아직 남았으니까.”

 “비행기에서 잘 텐데. 그냥 있을게.”

 나는 월리스의 방에 들어가 앉았다. 곧 월리스는 방에서 나갔고, 그 뒤를 이어 구미몬의 목소리가 뒤따라왔다. 둘의 이야기가 어렴풋이 들렸고, 옆에서 언젠가부터 자고 있는 치비몬을 쓰다듬다가, 어느새 침대에 누워 그 옆에서 쌓인 피로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2017/11/08

미완성.


'Short'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타케루, 소라] Paper Cranes  (0) 2017.02.25
[코시미미] 작은 세상  (0) 2016.12.25
[야마소라] Screws  (0) 2016.12.24
[다이타케] 사진  (0) 2016.10.15
[행사/배포] Lost in Translation?  (0) 2016.08.22
Posted by 금강포션
|

4장 상영회 때 드리려다가 어쩌다보니 드리지 못했던 글입니다.


'Short'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드벤처 시리즈] Memorial 1/3  (0) 2017.08.01
[코시미미] 작은 세상  (0) 2016.12.25
[야마소라] Screws  (0) 2016.12.24
[다이타케] 사진  (0) 2016.10.15
[행사/배포] Lost in Translation?  (0) 2016.08.22
Posted by 금강포션
|

[코시미미] 작은 세상

Short 2016. 12. 25. 23:31

 

크리스마스니까요. 짧게.

아직 미미 캐릭터를 어떻게 써야할지 몰라서 얼버무린 게 아쉽네요;;





 한산한 도로 위로 달리는 택시는 덜컹거리기는 커녕 오히려 멈춰있는 느낌이었다. 창 옆을 보면 그 재빠른 속도감을 느낄 수 있었지만 의식은 휴대전화의 작은 화면에 집중되어 있었다. 문자 한 통 때문에 택시까지 잡아서 가는 셈이었다. 그것도 직접 부탁을 받은 것도 아닌, 부탁을 넘겨받은 방식으로. 공항에 대신 가 줄 수 없겠냐는 짧은 문자 때문이었다.
 미미 상이 크리스마스 며칠 전에 도쿄에 왔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미 그때부터 어떤 작업에 무척 열중해 있었기에, 오늘 떠난다는 얘기를 보았다. 정말로 저녁까지 집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덕분에 그날 잡아놓았던, 성사 가능성이 불투명했던 약속들은 모두 깨져버렸다. 누구도 내게 연락하지 않았던 건, 어차피 연락을 보지 않았을 거라는 확신 때문이었을까? 실은, 오늘 아침에 일이 다 끝나버리는 바람에 지금까지 휴대전화를 손에 쥐고 있었다는 걸 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쉬운 것은 아니지만, 이럴 줄 알았으면 시간을 제대로 정리해둘 걸, 하는 자책.
 이미 크리스마스는 다 지나버린 때에, 공항은 또 결항이 되었다고 했다. 밖을 나왔을 때 눈이 꽤 수북히 쌓여있는 거리를 보고 좀 놀랐다. 택시에 나오던 라디오에서는 며칠새, 거의 폭설에 가까운 눈이 왔다고 했다. 비행기마저 못 뜰 정도. 눈이 내리면 화이트 크리스마스라고, 다들 기대하고 바라는 날씨지만 이렇게까지 축복을 내려줄 필요는 있었을까, 싶었다.

 “미미 상!”
 이륙하지 못하는 비행기가 꽤 많았는지 사람이 붐볐다.만약 눈이 이렇게나 오지 않았다면 벌써 이곳을 떠났을 사람들. 하지만 그 사이에서 미미 상을 찾는 건 어렵지 않다. 술래잡기를 해도 가장 먼저 잡을 수 있는 사람. 그런 느낌이었다.
 “코시로 군이 여긴 어떻게?”
 “대신 가 달라고 부탁을 받아서요.”
 “오늘까지 얼굴 한번도 안 비춰주더니.”
 “죄송해요. 지금이라도 볼 수 있어서 다행이네요.”
 모두들 크리스마스 분위기는 푹 꺼져버린 상태였고, 그런 분위기를 즐길 기색도 없었던 나는 이제야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빠져드는 것 같았다. 이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나는 사람이 미미 상이라는 거에 조금 더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다.
 “좀 늦었지만, 메리 크리스마스에요.”
 “너무 늦었어, 코시로 군.”
 “괜찮아요. 아직 미국은 크리스마스이기도 하고…”
 시계를 보면서 말한다. “아직, 11시 58분이니까요.”
 장난스럽게 말하는 건 아직도 어려웠다.

 “피곤하지는 않아요? 쉴 틈 없었을텐데요.”
 “코시로 군도 일 때문에 못 쉬었을 것 같은데, 지금 괜찮은 거야?”
 “전 일상이니까요. 그나저나 언제 다시 출발하는 건가요?”
 “자세히 말을 안 해줬어. 몇시간 뒤에는 될 거라고 해서 기다리고는 있는데, 언제쯤 되려나…”
 밖에는 아직도 눈발이 세차게 내리고 있을 것이다. 적어도 아침에는 다 그칠 거라고 들은 것 같아서 그 시간까지는 비행기가 뜨지 않을 거다. 그렇다면 적어도 아침까지는,
 “그때까지는 저도 여기 있을 수 밖에 없네요.”

 10년 전 처음 미미 상이 미국으로 떠났던 때가 생각났다. 모두가 바래다 주었고, 연락도 자주 할 것이라는 약속을 하면서 떠나보냈었다. 그때는 세상이 매우 넓다고 생각했다. 다른 나라로 떠나버리면 많은 시간이 지나야만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착각이었던 것 같다. 다른 아이들이 미국에 자주 다녀오고, 미미 상도 틈만 나면 도쿄에 찾아올 정도라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세상은 축구공만큼 좁아져버린 게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그때가 벌써 몇년 전인데, 지금은 얼마나 더 작아졌을까.

 “전 옛날에 미미 상이 미국에 갔을 때 영영 못 보는 줄 알았어요.”
 “나도 처음에는 다들 못 볼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지금도 계속 오고 있잖아.”
 “그때보다는 훨씬 가까워진 거겠죠?”
 “훨씬. 연락도 자주 할 수 있고 그러니까.”
 “가끔은요. 제가 미국으로 가도 될 것 같아요.”
 “나는 좋아! 혼자만 너무 많이 왔으니까.”
 간단하게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서로 바다를 오갈 수 있는 게 그렇게 쉬워진 게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쉬운 일이었다면 예전부터 계속 그랬을텐데, 아무리 세상이 좁아졌다고 해도 멀리 있는 건 멀리 있을 수밖에 없는 걸까.
 차로 목을 축였다. 약간 흐릿했던 의식들이 살아나고 있었다. 말을 하다보면 예전에, 그러니까 미미 상을 지금보다 더 자주 볼 수 있었을 때 느꼈던, 지금은 사라져버린 감정들이 다시금 떠오르고 있었다.
 “그때 지금처럼 세상이 좁았다면, 미미 상은 더 멀리 떠났을까요?”
 반응을 바랐던 것은 아니었지만, 못 알아들은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고는, 뜨거운 차를 계속 들이키기에 바빴다.

 한 달 전 쯤에 미미 상에게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다. 굳이 손으로 글을 써서 보내고 싶었던 내용이었다. 예전에 어떤 감정이 있었다는 이야기마저도 쓰기 어려웠다. 내용이 정확히 기억하지 않았지만, 결국은 말을 고르지 않고, 생각나는 데로 막 적었던 것 같다. 우편을 잘못 보내서 한 달이나 걸리는 우편으로 보내고 말았다. 계산을 해보니, 만약 편지가 제대로 도착했다면 아마 오늘, 미미 상이 집에 들어갈 때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때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썼기에, 내일 쯤에 나는 엄청 부끄러워질 게 뻔했다.

 뻔한 생각들을 하면서, 시선을 미미 상에게 맞추고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또 보지는 못할 거라는 생각, 사람이든 사물이든 간에 그런 생각이 들면 눈을 떼지 못한다. 그러다보면 그것을 보는데 집중해버리기도 한다. 그 시선을 느끼고 있다는 의식도 하지 못한 채.
 미미 상을 어떻게 떠나보낼까 고민했다. 매번 있는 일이지만 그때마다 어떤 말로 다음을 기약할지, 여러번 생각하게 되었다. 아직 미미 상이 읽지 않았을 편지 마지막에 잘 있으라고 적어놓은 것이 생각났다. 미미 상을 다시 볼 수 있지도 몰랐고, 그 편지가 지금까지 도착하지 않았을 지도 몰랐지만, 그게 오히려 더 다행일지도 모른다고 느낀다.
 편지에 그렇게 써 놓았으니, 오늘 작별인사는 생략하기로 한다. 다시 만나요. 입모양으로 살짝 전한다.


'Short'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드벤처 시리즈] Memorial 1/3  (0) 2017.08.01
[타케루, 소라] Paper Cranes  (0) 2017.02.25
[야마소라] Screws  (0) 2016.12.24
[다이타케] 사진  (0) 2016.10.15
[행사/배포] Lost in Translation?  (0) 2016.08.22
Posted by 금강포션
|

[야마소라] Screws

Short 2016. 12. 24. 00:32

From 야마소라 합작
http://daitake2002.wixsite.com/yamasora


글 자체는 3월 28일, 피아노 데이(한해의 88번째 날)에 쓰기 시작했습니다.

다만 완성은 하지 못했기에 합작 때 겨우겨우 완성했습니다.

제목은 작업하면서 즐겨들었던 앨범 제목입니다. 손가락 하나를 다친 상태에서 아홉 손가락으로 쳤던 곡들을 담은 거라네요.






_
 만약 사람이 손을 쓸 수 없다면 어땠을까. 팔에 손 대신 날개가 달려있었다면 모든 게 달라지지 않았을까?

작은 날개를 퍼득이는 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깃털 속에, 조금 다른 형태로 자리잡은 손가락. 그 손가락을 마주잡을 수는 없지만, 그 날개를 가득 품을 수는 있을 것이다. 가닥으로 뻗은 손가락으로 그 깃털을 어루만졌을 것이다.
 모피를 뒤집어 쓴, 그 가죽을 꽉 잡고 있는 손가락. 잠을 자고 있을 때 살짝 내려놓은, 자국이 잔뜩 남은 손바닥. 고리 같은 것을 끼웠음에도 힘을 주어 쥐고 있었던 손.
그 옆에서 같이 잠들어 있는, 새근 옅게 소리를 내고 있는 사람. 무릎 위에 놓여있는 하얀 손을 잡자, 감겨있던 눈꺼풀 사이로 하늘빛 눈이 드러난다.
 “갈 시간이야.”
 어느 날 꾸었던 꿈이었을까?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로 평온했던 때였다. 다시는 느낄 수 없을 것만 같았던.



 
_

잡고 있던 종이가 갑자기 붉어졌다. 손을 떼면 가운뎃손가락에서 한 줄, 피가 나오고 있었다. 그 베인 상처를 보고 나서야 손가락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낀다. 베인 지 조금도 안 된 것 같았다. 반창고가 가방에 남아있던가. 이따금 손가락을 다치는 횟수가 늘었다. 날카로운 것에 찔리거나 베이거나 한 상처들이 손 곳곳에 남아있었다. 예전에 붙여둔 반창고를 떼기도 전에, 다시 반창고를 감으면서, 이상하도록 그렇게 상처를 가리고 나면 그 부분이 전혀 아프지 않는 걸, 매번 느낀다.
 피가 묻은 부분을 포스트잇으로 가리고 나서는, 다시 방금과 똑같은. 손가락에 덕지덕지 무언가를 붙이고 감아도, 손을 움직이거나 하는 건 별 지장이 없으니까,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물이 묻을 때나 떼어져 다시 붙여야할 때가 아니라면. 먼지가 쌓여 붙어있지 않는 반창고를 뗄 때 보이는 하얗게 질린 살갗과, 그 사이에 아물지 않은 상처를 본다면, 다시 처음 상처가 났을 때 느꼈던 기분이 다시 살아났다. 따갑고 기분 나쁜, 반창고에 붙은 접착제의 끈적거림 같은.
 그렇다 하더라도 조금 지나면 낫는 거니까,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손가락이 욱신거렸다. 그 강도가 다른 때보다 셌기에 혹시나 손가락이 부러지거나 한 건 아닌지 걱정했건만, 역시나 그랬다. 이전에 손가락을 부러질만한 짓을 했는지 기억나지는 않았지만, 아팠던 건 어제쯤이었으니 다친 것도 그때쯤이었겠지. 하필이면 왜 왼손 검지일까. 몇 주 있으면 다시 나을 거라고는 했지만, 당장 연습 같은 건 못 하게 생겼으니 그건 그것대로 걱정이었다. 당장은 쉬는 것이 맞겠지. 다 낫는 동안에는 부활동은 하지 않던가, 조금만 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에게 조금 미안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들은 소리는 나을 때까지는 악기를 연주하지 말라는, 당연한 말이었다. 맞는 말이지만, 정말로 견딜 수 없을 때가 찾아오기 마련이다. 물론 이전에 겪은 적은 없지만, 오늘에서야 갑자기 그런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 손에 잡으면 안 될 것 같은 강박 같은. 다친 손가락을 쓰지 않고 만지는, 그런 식으로 계속, 해보고 싶기도 했다.
 별 거 아니었지만, 왜 이렇게 신경이 그 쪽으로 향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아픈 손가락이 조금씩 떨려 왔다.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 시간이 정말로 느리게, 아주 느리게 흘렀다. 프렛을 누르지만 제대로 운지가 잡히지 않는다. 차라리 엄지가 다쳤더라면 이렇게나 불편하지는 않았을텐데. 괜한 자존심 때문인지 점점 손가락을 세게 누르고 있기는 하지만, 한 손가락을 쓰지 않고 하기는 여전히 힘들었다. 분명 검지를 쓰지 않고도 제대로 잡을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그것까지 생각할 정도로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떠올릴 수 있었다면 이러지도 않았겠지만.
 포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을 나왔고, 물어본다면 그때나 말할 작정이었다. 답답함이 다른 느낌보다 먼저 목으로 나왔다. 그냥 나을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그러지 못할 거라는 건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단지 연습 때문은 아니었다. 연습을 하지 못하는 건 그렇게 문제가 아니겠지만, 그래도 그것이 계속 신경이 쓰이는 건, 의식하지 않는다고 해서 되는 개 아니었다. 손가락 하나가 이렇게 머리를 휘저을 줄이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_

 “오늘은 빨리 가 보세요. 나머지는 제가 하면 되니까요.”
 그 말을 하면서, 뒷말은 내가 항상 했던 말이라고 덧붙였다. 오늘은 오랜만에 문을 잠그는 일을 하지 않게 될 것 같다. 처음에는 만류했지만 어쩌다보니 억지로 떠밀려 가는 것이나 다름 없게 되었다. 이번에는 자신의 차례라고 말하는 건, 이제까지는 내가 그 말과 행동을 했다는 표시였을까.
 “소라 상, 손 빨리 나아요.”
 “아, 고마워.”
 언제쯤 나을까? 깊지 않지만, 그렇게나 짧은 시간 동안에 손가락을 공격하고 도망가버린 상처들이 아프지는 않지만 조금씩 찔리고, 베인 상황들을 떠올리게 한다. 조심해. 언제나 신경 쓰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나의 손이 아니었던 것 같다.

 복도를 걷다가 음악실 앞에서 야마토를 보았다. 야마토는 문 사이를 기웃거렸다. 평소에는 굳게 닫혀 있었지만 지금은 슬쩍 열려 있었다.
 “끝난 거야?”
 “엣, 소라? 이 시간에는 어쩐 일이야?”
 “어쩌다보니. 좀 빨리 끝났어. 야마토는?”
 “음, 나도 뭐, 끝났다고 해야 할까”
 이 시간대에는 마주친 건 처음이었다. 서로 다른 일을 하느라 바쁘니, 학교에서 마주치는 때는 등교 때나, 그 밖이 아니면 힘들었다. 우연 치고는, 마치 언젠가 약속이라도 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손가락은 다친 거야?”
 “어, 응. 부러젔다고 그러네. 뭐, 걱정할 필요는 없어, 몇주 뒤면 낫는다고 하니까.”
 야마토의 손가락 하나가 감겨있었다. 왼손. 오른손이 아니어서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등에 메고 있는 케이스 때문에, 그게 그렇게 다행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을 바꾸었지만.
 “근데 너,” 야마토는 내 손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손에 반창고가 늘어났어.”
 “응, 조금 다쳐서.”
 “요즘 너무 많이 다치는 거 아니야? 반창고로 아예 덮혔는데.”
 “다친 지는 조금 되었는데, 잘 안 낫더라고. 걱정 하지는 마.”
 서로 시선이 손가락에 머물고 있었다. 똑같이 다친 손가락이었고, 정도만 조금 차이가 있었을 뿐이었다.
 “근데 음악실은 어떤 일로?”
 “그냥, 열려있길래. 피아노도 보여서. 한번 쳐 보고 싶었거든.”
 문틈 사이로 조금 오래되어 보이는 피아노가 보였다. 넓은 방 구석에 조그맣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안에 있는 물건들 중에서 가장 눈에 띄었다.
 음악실에서 피아노 소리를 들은 것도 꽤 오래 전이었다. 언젠가 몰래 들어가 피아노를 연주하고 나오는 아이를 문 앞에서 마주쳤다. 여러 번, 항상 같은 아이였다. 매번 같은 시간에 음악실에서 여러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았다.
 어느날에 그 아이는 문도 닫지 않은 채 연주에 열중하고 있었다. 나도, 항상 그 아이를 마주치던 시간보다 빨리 그곳에 도착했고 그 아이가 혼자만 즐겨왔었던 소리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날 이후로는, 무슨 이유인지 그 시간에, 음악실에서 나오는 그 아이를 볼 수 없었다. 그 아이가 누구였는지 지금도 알 수 없지만, 그 소리만큼은 기억 한 편에 조그맣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모르는 거야?”
 “응, 꽤 오래 전 일이라서. 한 소학교 때?”
 “그때라면, 그 아이도 널 모르고 있을 것 같은데.”
 “그러겠지? 보자마자 도망쳐 버렸으니까.”
 야마토는 살짝 웃음을 지으면서, 문을 열고 그 앞자리에 케이스를 내려놓았다. 음악실 안은 밝지도 어둡지도 않았다. 해가 사그라들 시간이어서, 조금 붉어진 빛이 창문 사이로 새어 나왔다.
 “나도 하모니카를 시도 때도 없이 불었었는데.”
 “누가 자고 있는 옆에서?”
 “윽, 그렇게까지는 아니었어. 정말 복잡할 때는 그랬지만.”
 “장난이야. 옛날에, 잠결에 옆에서 들었던 것 같아서.”
 옛날에 떠났던 모험. 아마 그때였을 것이다. 하모니카로 불던 어떤 선율. 이름은 모르지만 조금 슬펐던 노래였다. 그걸 언제 처음 들었는지는 짚어보지는 않았지만, 언제 돌아갈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었던 때, 잠에 들던 그 사이에 들었던 멜로디가 떠올랐다.
 “피아노 쳐본 적 있어?”
 “아니, 옆에서 연주하는 걸 본 적은 있지만,” 뚜껑을 열자 건반이 보였다. 자주 사용하지는 않았는지 먼지가 조금 끼어있었다.
 “지금 만져보는 건 처음이야.” 야마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야마토는 의자를 오른쪽으로 비껴 앉았다. 손으로 건반을 이리저리 누르면서, 나오는 음을 듣고 있었다.
 “감은 오는데 어떻게 쳐야할 지는 잘 모르겠다.”
 가만히 서서 바라보다가 문득 의자 빈 곳에 앉았다. 약간은 삐걱거리는, 그렇지만 둘이 앉기에는 충분했다. 세 개, 네 개로 나눠진 하얀 건반부터 차례대로. 배운 적은 있지만 실제로 써보지는 못했던 것들이었다.
 “이거부터, 도, 레, 미 파. 맞지?”
 “응, 하얀 게 차례대로 가고, 검은 게 반음이네.”
 “으음… 알 것 같아?”
 “어, 조금은. 의외로 꽤 어렵네.”
 야마토가 누르는 손을 따라 건반을 누르면 높이만 다른, 같은 음이 나온다. 다른 음이지만 같이 들리면 짝을 이루기도 하고, 어떤 음들은 서로 기분 나쁜 소리를 내기도 하였다. 귀로만 느꼈던 것을 손끝으로 느껴보니, 더 가깝게 느낌이 전해졌다.
 “소라, 왼손 좀 빌려줄 수 있어?”
 “내가 왼손이 이래서, 힘들 것 같아서.”
 “응, 알았어. 어떻게 하면 되?”
 “처음에는 이렇게, 그 다음은 이렇게 눌러주면 되.”
 “잘 못할 것 같은데 괜찮을까?”
 “괜찮아. 나도 못하는 건 마찬가지니까.”
 그러고나서 야마토가 누르는 음은 정말로 익숙한 멜로디었다.
 “이거, 이지?”
 “맞아, 생각나는 멜로디가 이거라서.”
 그런 식으로 생각나는 멜로디를 계속, 손가락으로 누르고 있었다. 처음에는 짚어주는 데로 건반을 눌렀지만 금방 건반에서 나오는 음에 익숙해졌다. 이것을 누르면 이런 음이 나오는구나. 꽤 신기했다.
 서로, 한 손으로만 연주하는 건 힘들었다. 처음이었고, 원래 두 손으로 연주하는 것일텐데, 한 손으로 치는 시도는 당연히 어려운 일일 것이다.
 다만 왼손 부분을 칠 때, 다섯 손가락을 모두 써도 되는 건 아니었다.
 “자, 그러면…”
 말이 끊겼다. 야마토는 그 다음에 할 말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어색한 기운. 마땅히 무언가를 이어갈 것을 발견하지 못할 때 찾아오는 이상한 흐름. 노력했지만 나도 머리에서 떠오른 것이 없었다.
 “어떻게 할까?”
 제대로 된 질문은 아니었다. 정적을 깨기 위한 망치질.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다음 말을 꺼내지 못한다. 멍해져, 바로 눈 앞에 있는 것조차 흐릿하게 보였다. 검고 흰 바탕 위에 올려진 손가락들. 한 사람의 왼손과 다른 한 사람의 오른손. 그런 눈 앞에 낀 안개를 흘러내리게 했던 건 무의식적으로 누른 건반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의자를 누르고 있는 손을 포갰다. 부러진 검지가 느껴졌다. 다친 한 손가락 때문에 멀쩡한 다른 손가락을 쓰지 않는 건, 많이 손해이지 않을까, 이제야 느꼈다.
 길게 흐르는 음에서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잠시 스쳐지나가 깊게 남지 않았지만, 야마토에게 도움이 될 지도 모르는 무언가였다.
 “피아노는 아홉 손가락으로도 칠 수 있을 것 같아.”
 “확실히, 그렇네. 손가락을 다 쓰지 않아도 되니까.”
 “그러면 나을 때까지 조금 연습해 볼래? 그러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어?”
 “재활, 이라고 해야하나?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 다른 방법으로 손가락을 쓰면 될 것 같아.”
 “사실 정말 재활은 손가락을 쓰지 않는 것이겠지만, 배워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니까… 그래 볼까?”
 야마토는 전보다 자신감이 붙은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살짝 나타나는 표정이 좋았다. 약간 가라앉은 표정을 짓다가도, 가끔은 해맑은 모습을 보여줄 때도 있었다.
 “사실은 좀 답답했는데. 고마워.”
 “에, 정말 그게 고민이었던 거야? 몰랐었는데.”
 “그래? 뭐 어때. 원래 우린, 이런 거 잘 안 말하잖아.”
 “……잘 모르겠어.”
 “나도. 그냥 그런 것 같다고 느꼈어.”
 말이 끝나고 나서 눈이 마주쳤을 때, 이상한 마음에 서로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그 때 눈 앞에 무언가가 보였던 것 같았다. 어떤 감정에 푹 빠졌을 때 보이는 미래 같이. 그 앞에 스쳤던 건 창문 앞으로 잠깐 지나간 햇살이라 생각했다.
 “조금만 더 있을 건데, 너는?”
 “시간이 많이 생겼으니까. 같이 있을게.”
 잠깐 열려있는 문을 보고 문을 닫을 때, 뒤돌아보는 야마토와 눈이 마주쳤다. 의자에 꼭 붙어있었던 왼손이 건반 위에 있는 걸 보았다. 문을 닫고 잠시 기대었다. 눈을 감으면 앞에서 소리가 들렸다. 두 손을 잡으면 따뜻하지 않은, 반창고만 만져지지만, 조금만 지나면 다 떼어버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야마토보다는 빠르게 손가락이 낫겠지만, 그래도 서로, 조금씩만 더 빠르게 나아지고 있다면 더 좋지 않을까.
 한참동안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건, 지금까지 들었던 소리 중에서 가장 아름다웠다.

'Short'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타케루, 소라] Paper Cranes  (0) 2017.02.25
[코시미미] 작은 세상  (0) 2016.12.25
[다이타케] 사진  (0) 2016.10.15
[행사/배포] Lost in Translation?  (0) 2016.08.22
[합작/히다 부자] 꿈꾸던,  (0) 2016.03.06
Posted by 금강포션
|

[다이타케] 사진

Short 2016. 10. 15. 22:13

정말로 오래전에 누군가에게 드리려고 했던 글이지만, 어느 순간 보니까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있어서, 굉장히 미안한 마음으로 쓴 글입니다. 1년이 지난 사이에 저의 글이 많이 죽어버려서, 그게 많이 걱정이 됩니다.

한번이라도 재미있게 읽어주었으면 해요.


*

 항상 사진에 찍힌 다이스케 군의 모습은 잔뜩 화가 난 것 같은 표정이었다. 사진을 찍은 적도 별로 없었지만, 혼자서나, 다른 아이들과 찍은 사진에서는 밝은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어쩌다가 내 옆에서 같이 찍은 사진들을 보면, 뾰루퉁한 표정을 지은 채 플래시를 받았다. 찰칵, 그 소리가 나기 전까지는 밝은 표정을 짓지 않았다. 싫었던 걸까. 그때의 다이스케 군은 내 옆을 별로 탐탁치 않아했던 것 같다. 많은 때에, 다이스케 군은 내게 괜한 승부욕 같은, 무언가를 품고 있었던 것 같다.
“하필이면 말이야, 왜 네 옆에서 찍어야 하냐고.”
“뭐 어때? 다이스케 군은 마음에 안 드는 거야?”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니고 그냥!”
“그냥 뭐?”
“칫… 아무것도 아니야.”
다이스케 군은 내 말에는 한껏 기분 나빠하면서, 카메라를 들고 있는 히카리 짱이 말하는 거라면 곧이곧대로 행했다. 히카리 짱이 말한다면, 아마 내게 어깨동무를 하고 웃음을 지으라고 해도 억지로라도 했을 것이다.
“다이스케 군, 그렇게 멀리 떨어져있으면 안 보여.”
“헷, 알았어!”
그런 다이스케 군을 이상한 사람을 보는 것처럼 바라보면, 다이스케 군은 내심 앞에 있는 사람이 보라는 듯이 환한 웃음을 지었다. 내가 그런 표정을 짓는 게, 다이스케 군에게는 꽤나 재미있는 것이었는지는 몰라도, 다이스케 군은 나를 쳐다보면서 묘한 승리감에 빠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 단순한 메커니즘, 히카리 짱은 호, 나는 불호.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그렇게 간단하게 움직인다는 게 참 신기했다.
“그럼, 찍는다!”
셋, 둘, 하나. 숫자를 셀 때, 나는 다이스케 군의 어깨를 끌어와 어깨동무를 했다. 찰칵. 바로 확인해보지는 않았었지만, 시간이 지난 다음에 본 사진에, 나는 V를 한 채 웃고 있었지만 다이스케 군은 여러 감정이 막 섞여있는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확실히 웃지는 않았어.
“다이스케 군은 항상 나랑 사진을 찍으면 웃은 적이 없더라.”
“그런가… 뭐 때문인지는 모르겠네? 그날 기분이 좀 나빠서 그런가?”
“그렇게 말하니까 재밌어, 다이스케 군은.”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누가 재밌으라고 그러는 거로 보여?”
“헤, 난 진심으로 말한 건데?”
대답하지 않고, 그저 매우 기분 나쁘다는 듯이 쳐다보는 눈빛. 그 눈빛과 표정들이 이제는 조금 익숙해졌다. 다이스케 군이 짓는 다양한 표정들은 내가 좀처럼 따라할 수 없었다. 한번쯤은 그런 표정을, 한번이라도 지어봤을 것 같은데, 내가 찍힌 사진에서나, 다른 사람이 나를 바라볼 때나 나의 표정을 몇가지로 고정된 것 같았다. 그럴 수 있는 게 내심 부러웠었다. 그저 자기 감정에 따라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게.


*

내가 농구를 하는 게 다행이었다면 축구 경기를 응원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누군가에게 억지로 끌려나온 듯이 앉아서 턱을 괴고 쳐다보는 다이스케 군은, 나에게 응원 같은 건 별로 하고 싶지는 않다는 표정이었다. 반대로 축구 경기에서 내가 한껏 다이스케 군의 이름을 외칠 때, 다이스케 군은 나를 향해, 농구 경기를 바라보는 것과 같은 표정을 지었다.
오늘도 그랬다. 응원할 때 그렇게 싫다는 표정을 할 때는 언제고, 득점을 많이 할 때면 환한 표정으로 내게 이래저래 얘기를 늘어놓고, 그 말에 잘했다고 어깨를 두드리면 숙쓰럽다는 듯이 얼굴을 붉혔다.
“너, 얼굴 붉힌 거야, 다이스케 군?”
“아, 뭐…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기분이 이상하잖아.”
히카리 짱의 칭찬에 깜짝 놀라 기뻐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이상하도록 그 장면을 담아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 히카리 짱의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우연한 행운에 조심히 셔텨를 누르고 찍힌 사진을 보았다. 사진에 찍힌 모두가 웃고 있었다 그 안에 있는 다이스케 군도. 그 웃음이 괜히 신경이 쓰였다. 나에게는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 그 웃음이.
“타케루 군, 좀 있으면 농구 경기지?”
“응, 준결승이니까, 이기면 결승이겠지?”
“잘 하고 와, 타케루 군.”
히카리 짱에게 카메라를 돌려주고, 나는 가방을 매고 체육관으로 가려고 할 때, 다이스케 군이 툭 던지는 투로 말했다.
“잘 해. 나도 결승에 올라갔는데 너라고 못 올라갈 건 없잖아.”
고마워, 그 말에 웃음지었다.

옷을 갈아입고 연습을 조금 했다. 농구 경기를 할 아이들 중에도 방금 전 축구를 한 아이도 있어서, 조금 더 연습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간도 꽤 남았고, 다들 정리하고 오려면 더 시간도 걸릴테니.
조금 시간이 지났을까. 한명씩 체육관으로 왔다. 혼자서 연습하는 거보다는 역시 여러명이 같이 하는 게 낫다고, 아까 전과는 다르게 몸이 잘 풀리는 것 같았다. 시간이 거의 경기 시작 근처까지 다다를 때였다.
“타케루 군, 근데 한 명이 없는데?”
“음… 그러고보니 그렇네. 어디 있지?”
“걔, 아까 축구 뛰었는데 아직 다 안 끝났나?”
“아직 몇 분 안 남았는데…”
조금 더 기다려볼까, 하는 순간에 멀리서 누군가가 달려왔다. 우리가 찾는 사람은 아니었다. 다이스케 군이 농구복을 입고 나타나 허겁지겁, 신발끈도 묶지 않은 채 달려왔다.
“아직 안 늦었지?”
다이스케 군은 숨을 가쁘게 쉬면서 말했다. 사이즈가 조금 맞지 않는 옷 위로 머리에서 떨어진 땀이 엉겼다.
“네가 갑자기 왜?”
“그 애가, 축구하다가 다쳐서, 보건실에 가는 바람에, 내가 대신, 나오기로 했어.”
“괜찮겠어?”
“일단은 해야지, 지금은 방법이 없으니까.”
다이스케 군은 자리에 앉아 신발끈을 묶었다. 농구화도 그 아이에게 빌렸는지 사이즈가 맞지 않아 몇번이고 다시 신발을 묶어대었다. 신발을 다 묶고 몸을 푸는 다이스케 군에게 다가가 말했다.
“어쩌다 보니까 같이 뛰게 되었네.”
“걱정하지 마, 저번처럼 못하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으스대는 다이스케 군을 보면서 약간 걱정이 되다가도, 이기든 지든 재미있는 경기가 될 거라, 생각했다.

...

 2쿼터가 끝나고 생각이 스친 건, 과연 이 경기를 이길 수 있을지였다. 다이스케 군은 우려했던 대로 많이 실수를 해서, 종종 파울을 내주기도 하였다. 겨우겨우 점수를 좁혀갔지만, 그래도 많이 부족한 것 같았다.

 "미안, 내가 실수가 잦아서."

 지친 티가 팍 난 다이스케 군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말했다. 나는 그 얼굴에 물병을 갖다대면서 말했다.

 "네가 온 것만으로도 고마우니까, 지든 이기든 열심히 하자고."

 다이스케 군은 얼굴에 갖다댄 물병을 뺏어 물을 들이켰다.

 다이스케 군, 그 사이에 반 병을 다 마셔버린 다이스케 군에게 나는 말했다.

 "만약에 이기면, 같이 사진 찍기."

 "뭐 그 정도야."

 기원의 표시로 주먹을 마주치면서, 다이스케 군에게 한 말과는 좀 다르게, 이번 경기만큼은 이기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갑자기 떠오른 내기에 오기가 생겼다고 해야할까. 가능성은 별로 없어보였지만, 그래도 하나쯤은 걸어보고 싶었다. 그 사진 한 장에 괜한 신경을 쓰는지, 내 자신도 알 수 없었지만.


 무언가 사소한 것 하나만 걸어도 그게 효과가 있기는 있는 것 같다. 3쿼터까지만 해도 전 경기와 다를바가 없었지만, 마지막 쿼터 때 겨우겨우 점수를 따 겨우 몇 점 차이로 이겼다. 점수를 보면서 정신이 멍해졌고, 결승에 올라가기는 한 걸까 생각하던 사이에 다이스케 군은 뒤에서 어깨를 치면서 말했다.

 "축구도 농구도 이제 결승이네."

 "그렇네, 지금 이게 현실인지도 모르겠어."

 잠깐 자리에 앉는 동안에도 주위는 시끄러웠다. 눈을 감고 있으면, 다이스케 군과 히카리 짱의 목소리가 들렸다. 급한 마음에 히카리 짱을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번에도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었을 거라 생각했다.

 "타케루 군, 정말 수고했어."

 "아니야, 다른 아이들이 더 잘했는 걸."

"히카리 짱! 나 괜찮았어?"
"어, 음. 사진은 많이 찍었어."

"그래? 혹시 보여줄 수 있을까?"

행복한 표정으로 카메라 화면을 바라보다가, 다이스케 군이 나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어이, 타케루. 이기면 사진 찍자고 했잖아."

맞다, 그 말에 자리에 일어나 다이스케 군 옆에 섰다. 마침 히카리 짱도 있고 해서, 그 자리에서 바로 찍자고, 다이스케 군은 말했다. 다이스케 군이 옆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게 조금 놀라웠다. 평소에는 그렇게 싫은 티를 다 내더만, 지금은 많이 분위기가 달랐다. 어쨌든 그날 난 예전부터 신경쓰이던 일 하나를 해치웠다는 생각에 기분이 매우 좋았었다.


그 기억이 갑자기 떠오른 이유는 언젠가 펼졌던 책에 책갈피 같이 그 사진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별히 인화해달라고 했던 걸까. 시간이 꽤 지났지만 그 사진을 보니 예전의 기억이 살짝 떠올랐다.

 자랑할 일은 아니지만, 사실 그때의 내가 많이 부러워졌다.


'Short' 카테고리의 다른 글

[코시미미] 작은 세상  (0) 2016.12.25
[야마소라] Screws  (0) 2016.12.24
[행사/배포] Lost in Translation?  (0) 2016.08.22
[합작/히다 부자] 꿈꾸던,  (0) 2016.03.06
[합작/다이타케] 未定  (0) 2016.02.08
Posted by 금강포션
|

8월 21일 디지몬 피오케 "내일 날씨는 맑음, 때때로 아이스크림"에서 배포했던 글입니다.

부스에 오셔서 가져가신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인터넷 연재는 언제나 간단하지만, 미리 쓰지 않는 때에는 마음이 촉박해지기도 한다. 애초에 처음 쓸 때부터 책으로 낼 생각에 대부분을 다 쓴 다음에 연재를 시작했기에 마감의 부담감은 느끼지 못했지만, 연재가 끝나고 그 다음 이야기를 정리해서 다시 쓰려면, 수많은 데드라인 앞에서 넘어질 게 뻔했다. 마침 다음 작품을 얘기해보자는 연락이 와서 잠시, 기한을 길게 미뤄서 마음을 잠시 놓을 수는 있었다. 어쨌든, 그 요일에 빌 구멍을 매울 작품도 있었고, 어느 정도 그 연재처에 의견을 주장할 수 있는 권력도 생겨서 그런지 쉽게 넘어갈 수 있었던 것 같다.

 벌써 연재도 2년째인가. 미리 완성된 책을 내는 것보다 조금씩 보따리를 푸는 방식으로 내놓는 게 좋다는 말에 넘어가서, 도입부를 조금 다듬어서 일단 넘겨보았던 때가 하루 이틀은 된 것 같은데, 벌써 계획해 놓았던 두 번째 이야기까지 완결을 냈다니.

 막 연재가 확정됐을 때, 블로그에 예전부터 조금씩 언급하던 이야기가 나온다고, 적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이미 블로그를 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고 마이크로 블로그나 SNS를 썼기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보지는 않았다. 한 편집자가,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보면 좋다고 말해서 SNS 계정을 만들었다. 그 사람이 하는 말이,

 “타카이시 상은 뭔가, 아날로그 같으면서도 디지털 같다고 해야 할까요.”

 그 말에 답해, 나는 약간 세대 차이를 느끼는 어른처럼―이제는 내가 그 어른 중에 하나일지도―말했다.

 “디지털 세대의 첫 세대는 조금 아날로그가 섞여 있죠. 생각해보면 디지몬도 아날로그 같은 디지털이잖아요? 아직 세상은 아날로그로 돌아가니까요.”

 그 말을 하면서, 왠지 선배들과 친구들이 생각났다. 이상하게도 다들 디지털하고는 거리가 먼 일을 하고 있어서.



 어떤 말을 다른 언어로 바꾸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나는 잘 할 수 있는 언어가 일본어 밖에 없지만, 외할아버지처럼 두 나라 언어에 능통한 사람도 있고, 꽤 많은 사람이 두 언어 이상은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이 규격화 되어있지만, 언어만큼은 그러지 않았다. 같은 디지몬들끼리도 언어가 달라 어려워하는 것을 보고, 디지문자가 두 형태의 문자 밖에 없기 때문에 새 디지문자를 만들려는 사람도 있는 걸 보면.

 아무리 번역기가 좋아졌다고 해도, 전문적인 번역에 적극적으로 이용하지는 않는다. 일일이 사람이 머리로 고민하면서 번역하는 게, ‘구시대적인’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번역은 기계가 하지 못하는 일이라고, 내가 어렸을 때도 그랬지만 그 말은 지금도 사람들이 종종 말한다. 디지털이 해낼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고. 사람이 글을 쓰는 거와 같은. 아마 그 ‘사람‘에는 디지몬도 포함시킬 때가 올 거라 믿기는 하지만, 아직도 디지몬이 쓴 글이 나온 적은 없으니까.

 첫 이야기가 중반쯤 연재했을 때, 한 포럼에서 내 글을 영어로 번역하는 사람을 보았다. 서양 포럼은 어떻게 이용하는지 몰라서, 그 사람의 SNS 계정에 연락을 했다. 그냥, 잘 읽어줘서 고맙다는 말을 했다. 그 뒤에 온 장문의 답장에도 놀라긴 했지만, 일본어로 적은 문장에 더 크게 놀랐다, 일본어가 모국어인 나보다 더 문장을 잘 쓰는 것 같아서, 괜히 의아했다. 그런 사람들은 얼마나 공부를 한 걸까. 모국어로 쓰는 사람보다 더 많이, 그 언어를 공부하면 나오는 실력일까 생각했다.

 번역이 단순히 뜻을 옮기는 거라 생각했었다. 언젠가 외할아버지를 만났을 때, 외할아버지는 하이쿠를 쓰고 있었다. 일본어로 적은 시도 있었지만, 프랑스어로 적은 시도 있었다. 외할아버지께서 그 둘을 읽을 때, 그 두 시가 똑같은 음절을 가지고 있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 뒤에 덧붙여, 할아버지께서는 말했다.

 “사실, 둘은 똑같은 시야. 프랑스어로 먼저 쓰기는 했지만.”

 그걸, 단순히 번역하는 데만 몇 시간이 걸렸다고 푸념을 놓으면서, 음절 때문에 바꾼 단어도, 뜻이 꽤나 바꾼 것도 있다고 했다.

 “그러면, 둘은 다른 시가 아닌가요?”

 내가 이렇게 물어보자, 외할아버지께서는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맞아. 그래서 번역은 뜻을 단순히 옮기는 게 아닌 거지. 의식하지 않지만 제 나름대로 새로운 글을 하나 더 쓰고 있는 거야.”



 두 번째 연재가 다 끝나고 뉴욕에 갔었다. 많이 바뀐 것도 없는 것 같지만, 그만큼 모든 게 바뀌어 있는 이상한 도시,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곳에 눌러앉아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느낄지는 몰라도, 이방인인 나에게는 그랬다.

 언제나, 영어를 조금씩, 그냥 아는 단어로 얘기를 하는 것도 꽤 어려워서, 이곳에서 며칠 지낼 때는 꼭 아는 사람과 같이 일정을 보냈다. 그 아는 사람이 꼭 예전부터 같이 지냈던 사람인 건 아니었다. 몇 년 전에는 얼굴도 모르는, 블로그에서 처음 만났던 사람과 같이 다녔던 적이 있었다. 뉴욕에 살고 있는 일본인이었고, 오프라인에서는 처음 보는 사이인데도 오래전부터 만난 친구처럼 재밌는 시간을 보냈다. 인터넷에서만 만난 사람과 처음부터 그렇게 친해질 수 있을까, 생각했었지만, 그 때 이후로 조금이나마, 인터넷 친구를 많이 신뢰하게 되었던 것 같다. 가끔씩 오면 잠깐 만나 얘기도 할 수 있는 사이라면.

 뉴욕에 잠깐 온다고 얘기는 많이 했지만, 만나지 못한 적도 많았다. 항상 방송 일이 바쁜 미미 상이나,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굉장히 바빴던 것 같은 월리스나. 정말로 1년에 한 번, 그 날이 아니면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라 아쉬운 때가 많았다.

 그나저나, 이번에는 여기에 홀로 있어야 했다. 말을 좀 트여놓을 걸. 어디 가서 이상한 일이나 당하지 않게.


 시내를 걷다 보면 음식점을 몇 개 본다. 생각하기에 타지에서 자국 음식을 먹는 것만큼 재미있는 건 없는 것 같다. 그곳에 사는 일본인이 만드는 게 많기는 하지만, 가끔은 나와 비슷한 생김새인 사람이 그런 음식을 만드는 걸 보면 꽤나 재미있다. 이질감, 같은 걸 느낀다고 해야 할까? 그런 음식을 먹을 때마다 그런 느낌이 약간씩 섞여서 조금 묘한 맛을 같이 느낀다. 나쁜 맛은 아니었다. 좋다고 해야 할까. 편견 때문일 거라 생각하지만, 조리하는 방법도 각자의 해석이 있으니까, 그런 사람들의 해석은 일본인과 많이 다를 거라 믿는다.

 그래도 특유의 익숙함을 느끼고 싶을 때도 있다. 다이스케 군이 뉴욕에 하나 체인점을 냈다고 했었나. 오랜만에 받은 메일에는 브이몬이랑 같이 나온 유명 잡지 표지도 같이 첨부를 해놓았다. 관리 때문에 직접 라멘을 만들지는 못해서 아쉽지만, 그래도 라멘을 접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거라 기쁘다고 썼던가. 하여튼 다이스케 군은 재밌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정말로 소학교 때 말한 꿈을 이루다니, 어릴 적 꿈꾸던 어른이 정말로 되는 기분은 어떨지 궁금했다.


 늦은 밤, 가게 문 앞에는 Closed라고 붙어있었지만 안은 밝았다. 문이 잠기지 않고 열려 있었다. 안은 영업하지 않았지만 누군가가 있는 것 같았다. 다이스케 군은 아르바이트를 할 때도, 혼자 가게를 했을 때에도 영업이 끝난 시간을 넘어서 열심히 뭔가를 하고 있었다. 가끔 다이스케 군이 보고 싶을 때가 있으면 영업시간이 끝나고 그 가게에 왔었다. 항상 문이 잠기지 않아서, 슬금슬금 들어와 한껏 집중하고 있는 다이스케 군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종종 여유가 있으면, 새로 불을 켜 라멘을 하나 주기도 했다. 그때 무언가를 적고 있으며, 주는 라멘이 항상 다른 맛이었던 걸 보면 영업이 끝날 때마다 새로운 조리법을 연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브이몬만큼 다이스케 군의 조리법에 어느 정도 기여는 했을지도.

 지금도 그랬을 것이다. 많이 바빠서 지점에까지 들어가서 그러지는 않을 것 같은데, 정확히 그때와 비슷한 모습으로 뭔가를 적고 있는 다이스케 군을 보았다.

“오랜만이야.”

언제나처럼 화들짝 놀라는 것도 똑같아.


 습관은 무서운 것 같다. 다이스케 군도 그게 습관이 든 것 같다. 뉴욕에 온 차에 점검하려고 들어왔다가 지금까지 있었다고 말했다.

 “나도 네 가게에 불 켜져 있으면 계속 들어오는 것 같아.”

 “갑자기 와서 놀라기도 했다니까? 오늘도 그렇고.”

 “기막힌 우연이야. 뉴욕에서 이런 식으로 만나다니.”

 “그나저나, 글은 다 쓴 거야?”

 “다 끝내고 이제 다른 거 해야지.”

 이야기를 한창 쓰고 있을 때가 생각난다. 조금 오래 전이다. 다이스케 군이 자신의 가게를 연 지 얼마 안 된 때이니. 한창 연구를 하고 있는 다이스케 군에게 기억나는 얘기들을 많이 물었다. 다이스케 군만 아는 이야기도 있어서, 그 이야기를 적을 때 정말 다이스케 군이 정확히 말하고 있는 건지, 그걸 내가 정확하게 적었을지, 하는 의문을 가졌다. 내가 쓰는 표현들이 그 경험을 잘 반영해줄 지 걱정했다. 특히 나와 다른 아이들이 마인드 일루전에 당했을 때 다이스케 군은 어떻게 모두를 빠져나오게 했는지, 그 부분을 쓰면서 많이 마음에 걸렸다. 기억을 해석하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의 기억을 듣고 다시 글로 옮기는 건, 내 생각을 거쳐서 나온 표현들로 걸러져 나오는 거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다이스케 군이 적고 있는 종이를 슬쩍 보았다. 영어 문장이 적혀 있어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그 위에 익숙한 문장이 있었다.

 “이거, 내가 쓴 거 아니야?”

 그렇게 묻자, 다이스케 군은 종이뭉치를 급하게 숨겼다. 허겁지겁. 그런 모습은 언제나 재밌었다. 항상 놀리는 것 같아서 미안하기는 하지만, 그런 반응을 보는 건 좋았다.

 “뭐 숨길 필요는 없잖아. 어차피 난 영어는 못 읽는 걸.”

 “어... 그렇기는 하지.”

 다이스케 군은 다시 종이를 내려놓았다. 몇 장을 자세히 보니 그 문장은, 다이스케 군이 나오는 대목에 있는 문장이었다.

 “내가 나오는 부분을 한번 옮겨본 건데 뭔가 어려워. 뭔가 새로 쓰는 느낌이야.”

 다이스케 군은 조용히 말했다. 외할아버지의 말이 생각났다. 나는 다이스케 군에게 그 말을 했다.

 “원래 그런 거야. 번역하는 건 다른 언어로 새 글을 쓰는 거니까.”

 내가 쓴 문장과 다이스케 군이 다시 쓴 문장은 많이 다를 것이다. 궁금했다. 다이스케 군은 어떤 문장을 적었을지.

 “난 영어는 잘 못하지만, 다이스케 군이 쓴 표현은 어떨지 궁금한데? 다이스케 군이 겪은 건, 나보다 더 잘 쓰지 않을까?”

 “나야, 뭐 글 쓰는 건 정말 못하니까, 그러지는 않을 거야.”

 “음, 원래 글 쓰는 사람은 자기 글이 어떻게 번역됐는지 궁금하다고. 나도 그렇고 말이야.”

 “그러면, 한 번 읽어줄까?”

 다이스케 군은 그렇게 말하면서 다시 펜을 놀렸다. 나에게 읽어주려면, 그 문장을 다시 일본어로 번역해야 한다고 했다. 중역이라, 일본어를 영어로, 그 영어를 다시 일본어로 번역한다. 출판업에 있는 사람이 말하길, 그런 번역은 최악이라고 하지만, 지금은 번역을 잘하고 못하고가 중요하지 않았다. 다이스케 군 말고도, 이치조지 군은 자신의 부분을 어떻게 쓸지 궁금했다. 에스파냐어를 한다고 했었나. 그 언어로 글을 옮긴다면 어떤 표현이 나올까?

 Lost in translation이라는 영어 문구를 기억한다. 번역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의미이지만, 그저 뜻이 완벽히 같지 않아도 그 표현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 만약 모든 언어를 읽을 수 있다면, 내 글이 어떤 표현으로 바뀔지 궁금한데, 다른 사람들은 그러지 않은 것 같다.

'Short'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야마소라] Screws  (0) 2016.12.24
[다이타케] 사진  (0) 2016.10.15
[합작/히다 부자] 꿈꾸던,  (0) 2016.03.06
[합작/다이타케] 未定  (0) 2016.02.08
[가부몬+고마몬] 발견  (0) 2016.01.21
Posted by 금강포션
|

From 디지몬 가족 합작

http://daitake2002.wix.com/dfamily



6.
 그곳에서 난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처음으로 하늘 위에 있는, 그런 경험을 하고 나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어설프게 말하고 있는, 아버지의 이름을 되풀이하는, 그런 소리들을 그곳에 있는 동안 계속 들어야 했다. 그때는 내가 갔던 그곳이 어디였는지 알지 못했다. 수업 시간에 들었던, 저 멀리 유럽에 있는 섬나라가, 거기였다는 걸 안 건 나중이었다.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건 어머니와 할아버지뿐이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내가 말할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난, 입을 열지 않았다. 아버지가 어떻게, 얼마나 더 이곳에 있어야 하는지 물을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어머니께서는 분명 아버지와 같이 오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난 그 며칠 동안 아버지를 한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어머니의 말씀을 조금,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난 다시 되묻지 않았다. 대답은 언제나 같았다. 아버지를 이제 다시 볼 수 없다는 이야기뿐이었다.
 하필이면 그날 아버지가 가장 보고 싶어했던 것들이 나타났을 줄이야. 그때는 전혀 알지 못했지만.


 11.
 방을 정리하다가, 이제는 쓰지 않는 게임기를 발견했다. 집에 이런 게 있었던가. 문득 아버지께서 오이카와 상과 같이, 게임에 푹 빠져있었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오직 둘만 믿고 있었던 그곳, 그곳을 이 게임기를 통해 보았을까.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얽힌 선들을 푼다. 옛날 것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선을 텔레비전에 나사로 박아야 했고, 몇번이고 팩을 훅훅 불기를 반복했다. 수많은 시도 끝에, 가로선으로 지지직거리는 화면이 나타났다.
 평범한 게임이었다. 과일 모양을 한 캐릭터, 적으로 거미가 나오고, 여러가지 괴물들이 나오는 게임이었다. 그런 게임에서 두분은 무엇을 보았는지 궁금했다. 조금 버튼을 두들기다가, 그 캐릭터의 모양들을 따져보았다.

 피피몬, 츠부몬, 아라크네몬, 유키다루몬...

 하나씩, 내가 보았던 디지몬들을 대입해본다. 형태을 겨우 알아볼 수 없는 조악한 모양을 하고 있었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아마 이 게임이었을까. 두 분이 상상하고, 보고 싶어했던 것들을 난 직접 볼 수 있었던 걸까.
 게임기에는 조종기가 2개였다. 첫번째 건 아버지가, 두번째 건 오이카와 상이 가졌을 것이다. 두번째 조종기에는 마이크가 달려있었다. 게임 막바지, 두 캐릭터─피피몬과 츠부몬처럼 생긴 주인공들─가 뜬 화면에서, 난 마이크에 대고 말을 걸어보았다.
 안녕? 음성이 나온다. 말을 걸면 음성이 나오는 그런 기능이었다. 난 계속 말을 걸었다. 음성들은 제각각 달랐다. 마치 대화를 하는 것처럼, 그 음성은 내 이야기를 이해하는 듯 했다.
 "우리는 어디든 갈 수 있어!"
 그 음성을 끝으로 게임은 종료된다. 두 분은 어쩌다가 이런 기능을 찾았을 지도 모른다. 대화를 하면서, 실제로 화면 너머 생명체가 존재하고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된 것, 할아버지가 말씀하셨던 것이 이런 것이었구나.
 어떤 게임이었을까. 팩에 붙은 라벨에 쓰여 있는 이름을 검색해 보았다. 게임은 있었지만 내가 보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게임이었다. 두 분은 불량품을 하고 있던 셈이었다. 그 게임팩에 들어있는 게임을 마구잡이로 바꾸어놓았던 건 무엇이었을까. 정말로 그 안에는 디지몬이 있었는지도 몰랐다.
 피피몬은 정말로 있었고, 겨우 오이카와 상을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디지털 월드 어딘가에는 아버지의 파트너도 있지 않을까?
 만약 게임에 나오는 너희들처럼, 아버지도, 오이카와 상도 어디든 갈 수 있었다면.


 17.
 꿈을 꾸었다. 그 예전, 베리얼반데몬이 보여준 환상이 떠올랐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디지털 월드를 걷는, 그런 꿈이었다. 그때보다는 좀 큰 모습으로, 아버지와 거의 비슷해진 눈높이로, 천천히 눈앞에 있는 모습들을 말했다. 그곳에서 아버지는 여전히 경찰복을 입고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모습은 언제나 그런 모습이었으니까.
 넓은 꽃밭을 걸을 때였다. 저 멀리서 바람을 타고 무언가가 날아온다. 작은 디지몬? 바람의 흐름에 따라, 꽃밭에 내려앉은 디지몬은 곧 이쪽으로 통통 튀어온다. 츠부몬이었다. 앞까지 뛰어와, 곧 아버지의 품에 안긴다. 히로키! 하면서 부르는 이름은, 우파몬의 목소리와 비슷했다.
 "이오리, 이오리 아버지의 파트너인 걸꺄..?"
 우파몬이 품 안에서 물었다. 응, 이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정말로 그랬다면 좋았겠지만 그건 모르는 일이었다. 아버지에게 파트너 디지몬이 있을까? 있다면 어디에 있을까. 아직도 바람 속에 있을까? 어디든 돌아다니면서 아버지를 찾고 있다면, 지금쯤 어디를 향해 가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럴 거야, 우파몬."
 꿈에서라도 만났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면.


34.
 혼자서 아버지의 묘에 오는 건 오랜만이었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르고, 아버지가 꿈꾸었던 것이 이루어진 이때에, 그날로부터 쭉 아버지는 이곳에 있었다. 어디에도 갈 수 없이, 비석 위에 짖눌린 꿈들은 지금까지도 잠들어 있었다.
 그 사이, 난 아버지보다 더 오랜 시간을 살아버렸다. 가장 오래된 기억에는 아직도 아버지가 남아있었고, 그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가끔 아직도 꿈에서 아버지를 본다.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아버지는 어디에나 있었다. 나의 꿈에서, 아버지는 어디든 가고 싶은 곳에는 언제든지 있었다. 내 옆에도, 해변가에도, 디지털 월드에도.
 묘에 찾아올 때마다, 아버지께 얘기를 끝내고 난 손을 모아 잠시 기도한다. 아버지가 가고 싶어했던 그 곳을, 이제는 모두가 마음껏 달릴 수 있도록 빌어달라고. 누구도 만나지 못하는 일 없이, 라고.

'Short'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이타케] 사진  (0) 2016.10.15
[행사/배포] Lost in Translation?  (0) 2016.08.22
[합작/다이타케] 未定  (0) 2016.02.08
[가부몬+고마몬] 발견  (0) 2016.01.21
[합작/다이타이] Never Mind The Rain  (0) 2015.08.19
Posted by 금강포션
|

From 다이타케 합작 '그날의 우리'

http://moment0710.tistory.com/




 키보드에 손을 올려놓고 다시, 처음 한 글자를 띄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용기가 필요하다. 시작이 거의 전부니까, 첫 문장을 시작하기만 하면, 나머지는 어떻게든 이어나갈 수 있으리라. 그 시작이 죽을 만큼 어려울 뿐.

 그 새, 그렇게 시작을 걱정하던 동안, 어느새 1년 동안 연재를 끝낸 건 기적이었다. 붕뜬 기억을 잡아내고 다시 맞추어가면서 보낸 시간은 제법 좋았고, 새로운 사실들을 알아가는 것도, 그런 이야기들을 천천히 대조해보는 것도 꽤나 즐거웠다. 짤막했던, 따로따로 떨어져 있던 서로의 시선들이, 잊힌 무언가가, 다시금 살아나는 기분이다. 조금씩 나쁜 기억들도 익숙해지고, 모두 제자리를 찾아가는 느낌.

 잠깐의 안정. 맞춰나갈 이야기들은 많으니 또다시 그 어려운 시작을 맞이해야 할 것이다. 조금의 간격을 지나서, 첫 모험을 끝낸 어린아이에서 조금 자랐을 때 이야기가 다음이겠지. 3년 뒤, 오다이바로 전학 온 첫날에 다이스케 군을 보았던 것부터 시작해야 할 거다. 여름캠프 때 눈이 왔던 것처럼, 조금도 예상치 못했던 시작. 어느 때보다도 의미 있었던 1년. 그 날들을 잘 풀어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근데, 이상하게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구체적인 형상은 사라진 채 희미한 느낌들만 머리를 맴돌았다. 어느 거리를 지나는 실루엣같이, 스쳐 가 어렴풋이 잔상을 남긴다. 눈을 감고, 천천히 실루엣을 따라 달려가 붙잡고 나면, 여러가지 기억들과 사건들, 그런 것들이 모습을 나타낸다. 그때 적었던 일기들을 보면서, 하나하나 퍼즐을 짜맞춘다. 그러고 나면, 빈자리가 몇개씩은 생기기 마련이다. 아직 다 맞추지도 않았지만, 빠진 조각들은 귀퉁이들이어서, 한눈에 봐도 티가 났다. 그런 빈자리들은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었고, 언제나 도움이 필요했다. 뭐, 어찌 보면 나보다 더 많이 기억하고, 많이 겪었을 테니.

 다이스케 군. 그 이름을 오랜만에 떠올리면서 처음, 그날을 다시 기억해내려 한다. 어떻게 처음을 여는 상대가 다이스케 군이라니. 물론, 그 사이 3년간 아무것도 없었던 건 아니지만, 시작을 시작—조금 웃긴 말이지만—하기에, 그 첫 만남보다 더 인상적인 게 있을까,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항상 그 부분을 쓰려고 하면, 수도 없이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타이치 상을 글에 담을 때도 이러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은연중에 계속 망설이고 있었다.

 그만큼 그게 중요했던 걸까. 아니면—

 혼자의 기억으로는 무리였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기억력이 흐트러진 건지, 머릿속에서 시간대가 뒤죽박죽 할 때가 있다. 딴생각에 빠지고, 정신을 차리고 보면 전혀 이상한 기억을 뒤지고 있었다. 어렸을 때는 어떻게 다 기억할 수 있었는지. 그때 어느 정도 시작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아무것도 끝내지 못했을 것이다. 충격적인 사건이 없으면 점점 사라져 가는 게 당연한 건가. 항상 기억은 큰 무언가를 중심으로 움직이니까 말이다.

 그 큰 무언가는, 사실 아주 작은 것도 포함한다. 지금 울리는 메신저는 아마 오랫동안 울리지 않았으니. 언젠가 같이 가입해놓고 아무도 쓰지 않았던 메신저. 오랜만에 듣는 알림은 기억에 꽤나 오래 남을 지도 모를 일이다.

 「오랜만」

 다이스케 군은 말은 길게 하면서도 문자는 단답으로만 보낸다. 그동안 보냈던 문자 내용을 모두 기억할 수 있을 정도로 짧게 문자를 보냈다. 아마 마지막으로 보냈던 게, '다음에 보자'였나.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 말하는 시간대는 애매해지고 길어지기 마련이다. 어렸을 때는 '다음'이라는 시간이 엄청나게 짧았는데, 지금은 엄청나게 늘어져 버렸다. 그때의 1분이 지금의 하루로 바뀐 것 같이.

 답을 보내기도 전에, 다시 문자가 온다.


  「언제 만날까」

  「응? 만나자는 거야?」

  「응」


 예상대로 짧고 빠르게 대화가 이어진다. 오랜만의 연락에 갑자기 만나자고 대뜸 물어보다니. 뭔가 근황이라도 물어보려 길게 문자를 쓰기도 전에, 짧게 툭하고 뱉어낸다. 기분 나쁜 건, 짧은 문자가 아니라 그 쓰고 있던 걸 다 지워야만 하는 거라는 걸, 다이스케 군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다이스케 군하고는 순서대로 되는 일이 없이, 언제나 즉흥적으로 돌아간다. 어째, 종종 뒤죽박죽돼버린 일이 오히려 잘 풀렸던 적도 많았지만은.


  「언제 만나?」

  「5시에」

  「5시는 무리야.」

  「그럼 5시 반 공원에서」

  「알았어. 그때 만나.」


 오랜만에 온 것 치고는 조금 짧은 대화. 만나자고는 했으니 그때 가서 이야기해도 상관은 없겠지.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았고, 어차피 이것저것 하다 보면 또 밤을 새울 지도 모르니까. 어쩌면 만나서 할 말들을 생각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예전 얘기를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근데, 무엇을 먼저 꺼내야 할까.




언제나 새벽에 밖을 나오는 일상이지만, 오늘따라 바람이 춥다. 같은 곳에 살면서도 그동안 만나지 않은 게 신기하다. 하루의 시간이 너무나 짧아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내게만 그런 것 같다. 여유라고는 잠 밖에 없는 생활에 조금씩 익숙해지면서, 시간 관념도 점점 사라지는 것 같았다. 5시라니, 문 여는 시간이 이른 아침이라고 그렇게 약속을 잡는 자신이 조금은 이해가 안 됐다. 상관 없으려나. 글 쓰는 사람은 밤도 잘 샐 테니, 이런 시각에 나오라고 해도 되겠지. 덕분에 1시간 정도 잠은 버렸지만, 버틸 수는 있을 것 같다.


 그냥 만나고 싶었다. 어느 순간 다른 사람들이 그리웠고 그만큼 일은 더 힘들어져 갔다. 좋아하는 일이 생업이 되면 더 괴로워지는 것이 당연한 거지만, 처음 라멘을 만드는 일이 힘들다고 느낀 순간, 집으로 돌아와 잠을 설친 그 어느날이였던가. 그냥 기억나는 사람들 중 아무나 만나고 싶었다. 만나서 얘기라도 좀 한다면 기운이라도 차릴 것 같아서, 무작정 잘 만지지도 않던 메신저를 켜서 그 위에 보이는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하필이면 녀석인가. 어째 마지막으로 대화한 상대가 타케루였다. 1년 전이였던가. '힘내', 다음에 보자'라 보냈던 게 마지막이었다. 그 문자의 시각을 보니, 시간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기분이다. 내 '다음'은 도대체 얼마나 긴 시간일까? 짧은 시간을 말하는 단어들은 어느새 머릿속에서 지워진 느낌이다. 잠깐 사이에 하루는 지나있고, 눈을 뜨면 달력을 새로 사야 했다. 그러기를 몇 년, 시간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잊어버렸다기보다는, 생각을 할 겨를이 사라진 것일까. '잠시'는 어디에도 없고 그러기에 숨을 돌릴 시간도 사라진 지금, 아침밤, 길을 나설 때 마시는 공기는 그나마 위안을 준다. 지나가면서 보이는 풍경들이나, 가로등 불빛에도 기대고 싶은 심정이었다. 조금은 나아지리라, 내심 기대를 하지만, 그것이 나아질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기다리는 시간, 오랜만에 시간을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먼저 기다리는 사람의 시간은 느리게 가기 마련이다. 짧았던 시간이 다시 댕겨져 늘어나는 것처럼 몇분 지나지도 않았는데 1시간이 지난 것처럼 느껴진다. 고무줄처럼, 관성에 다시 짧아지겠지만, 그 기분을 즐기려 한다.

 그런 때에, 멀리서 오는 타케루의 모습을 보면, 먼저 그쪽으로 가서 중간에서 딱 마주한다. 인사를 하려 손을 올리는 걸, 바로 손으로 받아친다. 짝.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이 괜히 기분이 좋았다.


 "오랜만이다!"

 "응, 진짜 오래됐네."

 "그러게나 말이야. 같은 곳에 사는 데도 그사이 얼굴도 못 보고 말이야."

 "어쩌다 보니."

 "뭐, 바쁘니까."


 간단한 인사, 방금까지 쳐졌던 기분이 막 끌어올려진다. 뭔가 즐거운 마음에, 목소리는 예전처럼 들떠있다. 만나기는 했지만, 뭔가 준비를 하고 온 건 아니라서 갑자기 할 말이 생각이 나지 않는다. 물어보고 싶은 것도 꽤 많았던 것 같은데. 밤에 생각했던 건 어디로 사라진 걸까?


 오랜만인데, 무엇을 먼저 말해야 할까.


 


 평범한 근황. 그대로 라멘을 만들고 있고, 그대로 글을 쓰고 있다. 그때는 막 시작하는 단계였고, 모든 일들이 신기하게만 느껴졌는데, 지금은 어떤 지. 생각없이 돌아가는 일상이 계속 시작되고, 어느새 그 시작은 끝을 달려가고 있는 듯 했다. 언제나 그렇듯 그 끝에는 또 출발선이 그어져 있겠지만.

 다이스케 군은 마지막 대화 이후로, 소설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고 말했지만, 그새 연재가 끝났다고 하니, 조금은 궁금하다고, 나중에 봐야겠다고 말했다.


 "근데 볼 시간은 있을까?"

 "예전에 줬던 책, 며칠 만에 읽었어?"

 "아, 그거? 좀 읽다가 때려치웠어."

 "그럴 줄 알았어."

 "뭘 붙잡고 읽는 건 진짜 잘 안 되겠더라."

 "그래도 선물이었는데."

 "흠, 미안해. 집중이 안 되서."


 언젠가 다이스케 군에게 책을 하나, 선물했던 적이 있었다. 지역별 라멘의 특징이었나. 서점에서 우연히 보고 생각이 나서 그냥 주었었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 다 읽지 못하고 내팽개쳐버린 모양이다.


 "그래도 읽어보고는 싶어. 다는 못 읽어도."


 조금, 말할 거리가 점점 없어진다. 별로 달라진 게 없어서 그만큼 할 이야기도 없었다. 옛날얘기를 해보자. 대뜸 말하자, 말이 실처럼 뿜어져 나온다. 언제나 이야기해도 그 이야기들은 새롭게 들리고, 가끔은 전에는 몰랐던 새로운 기억들도 나타났다. 기억나지 않았던 것들이 다시 떠오르고, 집으로 돌아가면 다시 시작할 수 있을 정도로, 꽤 기다란 기억들이 풀어졌다. 그러다,


 "아, 갑자기 생각났는데."

 "응, 뭔데?"

 다이스케 군은 말을 멈추고, 눈을 감은 채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얼굴에 비친 미소는 아까와는 다르게 무미건조했다.

 "아니다."

 "그렇게 말하면, 괜히 궁금해지잖아."

 "말해도 되냐."

 그렇게 말하는 다이스케 군의 목소리는, 아주 많이 떨렸다.

 


 이상하게 타케루에게 별 감정이 없어진 것 같다. 어렸을 때는 타케루 같은 녀석들은 딱 질색이었다. 결함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어디에서나 잘 맞고 모두에게 잘 대하는, 그런 모습을 괜히 질투했었다. 사소한 질투는 허점이 있고, 언제나 간파당했다. 재밌는 아이. 뭔가 놀리고 싶고 장난치고 싶어하는. 그렇다고 해서 그런 걸 했다고 남을 미워하지도 않는. 이상하게 나는 그런 질색인 녀석들과 친하게 지냈다. 몇번을 그러면 엄청 미워했을 것 같은데, 그런 적은 전혀 없었다. 네 그런 점이 좋아. 언젠가 누군가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누군가. 뭐, 타케루 아니면, 달리 떠오른 사람이 없다.

 이제야 기억나는 건, 그런만큼 타케루는 내게, 많이 칭찬을 해줬다. 처음에는 그것마저 장난인 줄 알고 기분 나빴지만, 점차 그게 진심이었다는 걸, 어느 쯤에야 깨닫게 됐다. 나는 언제나 그가 결점이 없다고 생각했었지만, 그건 아마 착각이었을 것이다.

 그 이후로 나는 타케루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굉 히 이상한 감정이었다고 해야 하나. 난 널 조금 좋아했던 것 같았다. 그게 친구로서였는지, 아니면 다른 의미로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어느 한 측면으로만은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하고 불분명한 감정이었다. 분명 뭐라 말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지금은 모두 사라졌지만.

 그런 걸 보면 나는 너에게 많이 무뎌진 걸까. 언제나 치던 장난에도 그냥 넘어가 버리고, 별 감정없이 그를 대하는 것도. 난 언제부터 너를 싫어했던가. 아니면 언제부터 좋아하게 되었던가. 생각해보면 우리는 친구였던가. 아니면, 그냥 함께 있어야 했던 동료였던가. 점점 그 질문들은 아주 처음, 타케루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거슬러 올라가려 하고 있었다. 무작정 시간을 비집어, 결론을 쫓아가다 보면, 결국은 난, 그를 좋아하고 있었던 걸까.

 그건 나중에 생각하자. 조금 더 나중에.



 예전 기억을 떠올리면, 그 장면들은 내 시선이 아닌 다른, 그러니까 그 위에서 보거나, 옆에서 보는 시선으로 보여졌다. 내가 아닌, 누군가가 캠코더로 나를 찍은 영상을 그대로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실감이 나지 않는, 영화를 볼 때처럼 편히 앉아서 그 장면을 감상하고, 거기에 평을 내리는 기분이었다. 그때, 내가 다이스케 군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무리 떠올려도 그런 감정은 떠오르지 않아, 하나도 이입이 되지 않았다. 장면 하나하나가 무미건조하게 느껴지고, 늘어지는 음악이 같이 나오는 것처럼 그 장면에 전혀 집중이 되지 않았다.

 기억이 잘 안 나는 탓일까. 다이스케 군과 보낸 기억들은 왠지, 잔상 하나가 왔다갔다 하는 것 같다. 느낌은 있지만 구체적인 것이 떠오르지 않는다. 다이스케 군과 이런 일이 있었고, 이런 느낌을 얻었지만, 그 중간이 비어있었다. 그저 의미가 있었다, 라는 거로는 설명이 안 되는 무언가가 빠져있었다.

 물어볼까? 아니, 묻기보다는, 자연스럽게 느껴야하는 게 당연한 건데, 아무리 해도 감이 안 잡힌다.

"아, 맞다."

 "뭐가?"

 다이스케 군은 하늘을 보면서 말한다. 어느새 하늘이 맑아지고, 햇빛이 조금씩 느껴지고 있었다. 그때쯤이면 한창 밤을 새서 멍하게 있거나, 잠결에 뒤척이고 있을테지만, 덕분에 이 시간에 제정신으로 서 있다. 아쉬운 마음에, 그 다음에 뭘 할까 하는데, 문득 지금이 문 여는 시간일까 생각했다. 이 이른 시간에 라멘을 먹을 사람이 있을까. 일찍 여는 거라면 문 열고는 한동안 사람이 없을 테니까.


 "지금 문 열 시간이네. 다음에 보자!"


  빠른 걸음으로 나서는 다이스케 군을 조용히 따라간다. 뒷모습에 시선을 맞추면서, 이렇게 저렇게 바뀌는 걸음걸이를 따라하면서 걷다가, 다이스케 군이 뒤돌아보자, 갑자기 장난끼가 돌기 시작한다.


 "뭐냐."

 "응? 그쪽으로 가는 건데."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다시 가는 걸, 계속 뒤쫒는다. 오랜만에 어떻게 장난을 쳐야 할 지 생각은 나지 않았다. 다만, 어떻게 말해야 다이스케 군이 약오를 지는, 이미 입에 배어버린 모양이었다. 몇걸음 옮기지도 않았는데 다이스케 군은 다시 내게 말한다. 


 "지금 나 따라오는 거냐."

 "응, 돌아가는 김에 라멘이나 먹고 가려고. 네 집 가도 되지?"

 "야!"

 "난 인사 안 했으니까 아직은 헤어진 거 아니지?"

 "나 바쁘다고, 타케루. 정말..."


  그 사이에 다이스케 군 옆으로 바짝 다가간다. 뾰루퉁한 표정은 예전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잠시만 더 장난을 치고 싶었다.


  "첫번째 손님인데 그렇게 막 대할 거야?"

 "그거 때문이 아니잖아! 문 연다고 바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만들기 전에 해야할 게 얼마나 많은지 알아? 재료 옮겨야지 또—"

 "알았어, 기다리면 되지."

 "너 앉혀놓고 그러고 있으면 내가 마음이, 어, 좋겠냐, 어?"

 "화내지 말라고, 다이스케 군."

 "휴, 제발..."

 "혹시 모르잖아. 오늘 헤어지면 또 언제 만날지."


 한숨, 기분 나쁘고 짜증나는 게 얼굴에 딱 피어있는, 그런 모습에 우스워서 겨우 웃음을 참는다. 한때는 일상처럼 보던 얼굴이었는데, 지금 다시 새롭게 다가온다.


 "알았어, 따라오기만 해."


 더이상 하면 진짜로 화낼 것 같아서, 그냥 걸음을 디딘다. 막상 가면, 말할 틈이 생길 리는 모르겠지만, 아마 사람이 들어오면 그럴 여유로 없어질 게 뻔하지만, 뭔가 다 하지 못한 것 같은 찝찝한 마음에 조금이나마, 이 기회를 붙잡으려 한다. 다이스케 군도 마찬가지일 거라, 믿으면서.


 아직은, 할 말이 너무도 많으니까.



'Short' 카테고리의 다른 글

[행사/배포] Lost in Translation?  (0) 2016.08.22
[합작/히다 부자] 꿈꾸던,  (0) 2016.03.06
[가부몬+고마몬] 발견  (0) 2016.01.21
[합작/다이타이] Never Mind The Rain  (0) 2015.08.19
[전력 12주차] Rolled Down Again  (0) 2015.07.18
Posted by 금강포션
|

[가부몬+고마몬] 발견

Short 2016. 1. 21. 00:34

  아, 너무 늦어버렸다고 생각한 순간, 개울은 건너갈 수 없을 정도로 불어났다. 빨라진 물살에서 겨우 빠져나온 고마몬의 다리에는 붉은 무언가가 흥건하기 나오고 있었다. 앞발로 겨우 몸을 옮긴 고마몬은 그 자리에서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괘, 괜찮은 거야?"
 가부몬은 고마몬의 앞발─아마 자신은 손이라고 하는─을 잡고 땅 위로 끌어올렸다. 오른 다리에서 나오는 무언가는 멈추지 못하고, 땅 위를 적셨다.
 "그.... 그 상처는..."
 "모르겠어. 아까 빠져 나오다가 내려오는 거에 맞았나 봐."
 고마몬은 조금씩 발을 옮기다가, 픽 쓰러진다. 가부몬은 그 모습을 보고 괜찮냐고, 계속 물어보지만 고마몬은 대답하지 않는다. 희미하게 새어나오는 숨소리를 어렴풋이 듣고, 가부몬은 상황이 심각함을 느꼈다. 망설였다. 그 자신 특유의, 우유부단함과 소심함을 잘 알고 있기에, 가부몬은 어떻게든 그 천성을 이기고 싶었지만 지금도 망설이고 있음을 원망했다. 고마몬. 가부몬은 고마몬의 활발한 성격을, 먼저 행동에 나서는 모습을 내심 부러워했다. 만약 자신이 상처를 입어 쓰러져 있었다면, 고마몬은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아, 지금 이럴 때가 아니다. 머리 속에서만 생각하지 말고, 행동을, 행동을.
 가부몬은 고마몬을 들었다. 의외로 쉽게 들려 흠칫 놀랐다. 조금씩 꺼져가는 듯한 숨을 느끼고, 일단은 피할 곳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 어, 업힐 수 있겠어?"
 고마몬이 고개를 끄덕인다. 가부몬은 고마몬을 들쳐매고, 개울 옆 빽빽한 숲으로 달려간다. 빗방울이 나뭇잎에 부딪쳐 나는 소리들이 귓가를 매웠다. 고통에 동반되는 신음이 들렸다. 조금만 참아. 가부몬은 그 말을 반복하면서, 주룩주룩 내리는 거센 비를 피할 곳을 찾고 있었다. 곳곳에 난 긴 풀들을 뜯고 나뭇가지를 주우면서,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감각을 세우면서...

 
 풀이 생각보다 길지 않아서, 상처를 묶기 힘들었다. 풀 여러 개를 묶어서, 그걸로 다시 상처를 묶었다. 이제 다리에 그 무언가는 멎은 것 같았다. 고마몬은 꽤 안정된 것 같았다. 가부몬은 남은 풀들로 불을 붙여보려 했지만 축축히 젖은 탓에 쉽게 불이 붙지 않았다. 불을 뿜어도 그을리기만 하는 풀들은 가지고 온 것들 중 반이 그을려 바스라졌다. 몇번을 시도해, 겨우 불씨가 붙어 활활 타오르지는 않아도 불 하나는 만들 수 있었다.
 작은 불로, 젖은 몸을 조금 말릴 수 있었다. 그 옆에서 고마몬은 발, 아니 손을 쬐고 있었다. 아까 전까지 지쳐있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따뜻한 온기를 느끼는 표정에는 오하려 여유로움 같은 게 느껴졌다.
 "이제 좀 나아?"
 "응, 조금 아프지만 괜찮아."
 "내일 정도면 그칠 거니까, 아침 정도에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
 희미하게 빗소리가 들렸다. 분명 멀리서 들려오는 것인데도 크게 소리가 울렸다. 이렇게 내린다면 내일도 어쩌면 발이 묶이게 될 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비가 빨리 그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근데, 가부몬."
 "으, 응."
 "아까 기억이 안 나서 그러는데 말이야. 나 업고 여기까지 온 거야?"
 "어... 그랬어."
 "고마워, 가부몬."
 "으... 으음.. 어..."
  가부몬은 고개를 움추리고, 떨리는 소리로 대답했다. 고마몬은 자세를 고쳐 팔을 벌리며 누웠다. 바닥이 울퉁불퉁해 눕기에는 편하지 않을 것 같았지만 고마몬의 표정은 꽤 편한 기색이었다.
 "부끄러워 하지 않아도 돼. 뭐, 도와준 게 부끄러운 일은 아니잖아?"
 "그건... 맞아..."
 "근데 저 비는 언제 그칠까. 다리만 아니면 좀만 더 있어도 될 텐데."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음... 둘만 있는 건 처음이잖아. 아니야?"
 "그렇긴 한데..."
 "솔직히 이렇게 비가 내려서 개울이 넘친 건 예상하지는 못 했는데. 갑자기 엄청 내리지 뭐야. 그런 물살에는 물고기들을 불러도 다 떠내려가서 어쩔 수 없었어."
 "......"
 "그리고, 갑자기 다친 것도, 네게 업혀서 여기까지 온 것도, 뭔가... 새롭네."
 "......"
 "아, 모르겠다! 일단은 피곤하니까, 눈 좀 붙이고 내일 생각하자. 그게 낫겠지, 가부몬?"
 "으, 응..."
 고마몬은 기지개를 편 뒤 금방 잠들어버린다. 저렇게나 빨리 잠들어버리나. 상처 같은 건 신경도 쓰지 않는 태도가 조금은 이상하기도 하면서도 조금은, 닮고 싶은 점도 있었다. 여유로운, 당차고 밝은 모습을, 좋아하고 있는 건 지도.
 작아지는 불에 한번 더 불을 붙이고, 가부몬은 자리에 누우려 그 옆으로 갔다. 고마몬은 불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자고 있음을 깨닫는다. 불을 옮길 수도 없는지라,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했다. 쓰고 있는 가죽이 어느정도 다 마른 것 같았다. 거의 벗어본 적이 없는지라 어떻게 벗는지도 잊어버려서 그냥 막 잡아빼서 벗었다. 충분히 덮일 수 있는 크기였다. 고마몬에게 가죽을 덮이고는, 가부몬은 한등안 멍하게 고마몬을 바라보고 있다가, 그 옆에 눕는다. 불편하고, 그다지 잠이 오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내일 고마몬이 일어나면, 가죽을 벗은 모습을 볼 것이 좀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가부몬은 고마몬에게는 괜찮을 거라, 생각하며 조금씩 잠 속으로 비집어 들어갔다.


 상처가 다 아문 것 같지는 않았지만, 아픈 것은 덜했다. 고마몬은 기지개를 펴다가, 자신에게 덮힌 가죽과, 옆에 누워 있는 가부몬을 보고는 흠칫 놀랐다. 이 가죽이 벗을 수 있는 것이었나. 그 황색의 몸은 꽤 어색해 보인다. 그동안 왜 그 가죽을 소중히 여겼는지 조금은 알 수 있었다. 가죽을 벗은 모습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고 느끼면서, 고마몬은 가부몬을 흔들었다.
 "일어나! 가부몬!"
 "으음... 일어났어...?"
 "이런 거 안 덮어줘도 되는데."
 "그냥... 추울까봐..."
 가부몬은 아직 잠에서 다 깨지 않은 척했다. 부끄러운 마음에, 눈도 꽉 감은 채 대충 대꾸했다. 고마몬은 가죽을 다시 가부몬에게 덮어주고는 비가 그친 것을 본다.
 "그쳤다."
 "......비?"
 "응. 이제 갈까?"
 "아니... 너무 졸려서..."
 "그러면 좀만 더 눈 감고 있어."
 고마몬은 아직 잠에서 덜 깬─그런 척 하는─가부몬은 바라보았다. 어제오늘, 뭔가 고마운 일이 많아지고 있는 걸 느끼면서. 고마워, 다시 머리속에서 되내인다. 말하는 건, 있다 가부몬이 일어나고 난 다음에 해도 될 거라 생각하며.



+2016.02.17

유우님께서 이 글을 가지고 다시 글 하나를 써주셨습니다. 정말로 고마워요.

http://sorarjqeprl.tistory.com/59


'Short'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합작/히다 부자] 꿈꾸던,  (0) 2016.03.06
[합작/다이타케] 未定  (0) 2016.02.08
[합작/다이타이] Never Mind The Rain  (0) 2015.08.19
[전력 12주차] Rolled Down Again  (0) 2015.07.18
[디지몬/다이타케(?)] 무제  (0) 2015.06.28
Posted by 금강포션
|

2015년 7월 14일.

7월에 열렸던 타이치른 노래합작에 제출했던 글입니다.

합작공개가 예정보다 늦어져 8월 18일에 공개가 되었습니다.

사소한 오류가 있습니다만 너그럽게 보아주셨으면 합니다.

합작 주소: http://rona1224.wix.com/taichi







*
 또 비구나. 생각이 차오를 때면 어김없이 비가 내렸다. 비라도 맞으면 좀 씻겨져 내려가지는 않을까 내심 기대하면서, 그렇게 생각에 잠기지만 오히려 더 쌓이기만 했다. 무언가가 더 심각해지는 것 같아서, 마음이 나아지는 것 같지 않아서 가슴이 메었다.
 모든 것이 이상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점점 더 멀어지는 것 같았다. 아닌 걸 잘 알면서도. 친구들, 후배들, 그리고 사랑하는 동생이 곁에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무언가가 흩어지는 느낌은 가시지 않았다. 점점 더 멀어져 주위에 아무도 없는, 혼자가 되어버리는 것 같아서, 어느 것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떠나가 버릴 거라면, 내가 어떻게 하든지 간에 달라지는 것이 없지 않을까.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게 되지 않을까.
 기운이 빠진다. 괜한 생각, 그저 쓸 때 없는 걱정인 것을 알면서도 밀려오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 이 비처럼, 그저 흘러가게 둘 뿐이였다.

*
  머리가 복잡했다. 너무도 무거워서 무너져 버릴 것 같았다. 어지러운 생각들이 먹구름 같이 밀려와 머리 속을 가득 누르고 있었다. 하늘도 먹구름에 덮혀 잔뜩 흐렸다. 언젠가부터, 먹구름이 끼는 날이면 마음이 복잡해졌다. 예전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언제부터였을까. 다시 머리속이 복잡해진다.
 어쩌면, 다시 타이치 상을 보게 될까봐, 비에 젖어서, 어두운 표정을 하고 앉아 있는 것을 보게 될까봐 그런지도 모른다. 그런 모습을 몇번이나, 같은 장소에서 보았다. 공원 그네에 앉아서 상념에 빠져 있는 모습을. 그럴 때마다 다가가지 못하고 멀리서 보고만 있었던 나는, 만약 지금 비가 내린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방울 하나가 얼굴에 떨어진다. 비가 내리는 구나. 다시 그곳에 간다면, 타이치 상을 보게 될 것이다. 오늘은 갈 것이다. 그 앞에 서서 물어볼 것이다. 어쩌면 오늘이 아니면, 영원히 다다가지 못할 것 같았다. 그 어두운 두 눈을... 난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내가 그 얼굴에 덮인 먹구름을 털어낼 수 있을까. 그렇게 한다면 타이치 상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나아지지는 않을까......

*
 "타이치 상."
 "어, 다이스케."
다이스케는 삐걱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네에 앉아 있는 타이치 상은 그 어느 것 보다도 무겁게 보였다. 비에 젖어 잔뜩 내려앉은 머리가 얼굴을 덮어서 그 표정을 알 수가 없었다. 타이치 상은 얼굴을 쓸어올렸다. 그리고, 웃는 표정으로 가볍게 말했다.
 "좀 이상하지."
 "아니요, 전혀요."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멀리서 보기만 했던, 그 모습과 똑같았다. 그렇게 태연하게, 밝은 목소리로 말하는 게 너무 싫었다. 무언가 그 속에서는 뭔가 엉켜버렸으면서.
 "예전부터 봤어요. 여기서 뭘 하고 있었던 거에요?"
 "그냥, 생각 좀 하고 있었어."
 "무슨 생각이요."
  "...맞춰 봐."
 이런 상황에서까지 타이치 상은 장난을 치고 있었다. 평소 같았다면 아무렇지도 않았겠지만, 지금은 억지로 그렇게 행동하는 것 같았다. 또 생각해야만 했다. 무엇 때문에 괴로워 하는지 고민해야 했다. 차라리 그냥 알려주었으면 좋았을텐데... 괴롭게 그 이유를 알아맞춰야 한다.
 "힘드신 거죠. 쓸 때 없는 것 때문에요."
 ......
 "그냥 서 있는 것 자체가 버거운 거죠."
 ......
 "위로가 필요한 거, 아닌가요?"
 ......
 침묵이 두려웠다. 아무런 표정없이, 타이치 상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젖은 머리가 얼굴을 가릴 때마다 계속 머리를 넘기면서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맞아, 네 말."
 타이치 상은 무덤덤하게 말했다.
 "그러면 말이라도 하지 그랬어요!"
 갑자기 울화가 치밀었다. 정말로 위로가 필요했던 거라면 그렇게 혼자서 비를 맞기만 했을까. 다른 누군가에게 털어놓지도 못한 걸까.
 "한마디라도 하지 그랬어요...... 힘들다고, 괴롭다고 말하지 그랬어요. 적어도—"
 목이 메어서 말이 막혔다. 적어도...? 누구에게 먼저 말했을까. 아무도 생각나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에 위로를 구한다면—
 "...적어도 저에게는 했어야죠!"
 그 사람이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타이치 상은 눈을 감고 있었다. 내 마음은 쏟아졌고 타이치 상은 골똘해졌다. 내가 괜한 말을 꺼낸 걸까. 위로는 못 할 망정 오히려 화만 내버렸다.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게 아니였는데... 또다시 거친 말투로 말해버렸다. 깊게 생각에 잠긴 것 같았다. 그 틈을 타 나는 어떤 말을 해야 할 지 머리 속을 헤집고 있었다.
 타이치 상이 눈을 떴다. 아까와는 다르게 맑은 표정으로, 일어나 말했다.
 "너까지 괴롭게 할 수는 없잖아. 굳이 너에게 넘겨줄 필요는 없으니까."
 "그런 건 충분히 견딜 수 있어요. 타이치 상이 짊어지고 있는 것이 아무리 무겁다고 해도 전 충분히 이겨낼 수 있어요. 그러니까 혼자서 그럴 필요는 없어요. 다만...... 다만, 피하려고만 하지 말아주세요. 예전에 타이치 상이 제게 격려해 줬던 것처럼, 저도 타이치 상이 힘들 때..... 힘들 때......"
 더이상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울고 있었다. 눈물이 비에 섞여 미지근하게 볼을 타내리고 있었다. 엉엉거리는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빗소리에 묻혀 들리게 되지 않기를 바랐다. 참을 수 없이 눈물이 밀려와서, 제대로 타이치 상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타이치 상이 옆을 쳐다 보았다. 거기에는 우산 하나가 펼쳐진 채 널부러져 있었다. 고장나서 버려진 것은 아닐 것이다. 아니, 어쩌면 접을 수 없어서 버려진 것일지도 모른다. 타이치 상은 그 우산을 주워서 내게 다가왔다.
 "써. 비 맞으면 안 되지."
 "아니요... 오히려 타이치 상이 맞으면 안 되죠. 저는 충분히 맞아도 돼요."
 "아니, 그런 뜻이 아니야."
 "그럼..."
 "너 울고 있잖아. 나 때문에... 나 때문에 울고 있잖아."
 타이치 상이 껴안는 것을 느낀다.
 "나 때문에 울 필요는 없어."
 나는 그 어깨에 파묻혀 소리내어 울고 있었다. 타이치 상은 내 등을 토닥이면서 울지 말라고, 계속 말하고 있었다. 괴로웠다. 위로하고 싶다고 말했는데 오히려 위로받고 있었다. 내가 타이치 상을 위로할 수는 없는 걸까. 어쩌면 그런 존재가 될 수는 없는 걸까.
갑자기 무겁게 내려앉았다. 몸이 내 쪽으로 기운 것 같았다. 타이치 상은 나 어깨 가까이 얼굴을 파묻고 말했다.
 "잠시만 이렇게 해도 괜찮을까?"
 나는 가만히 있었다.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기댄 몸을 끌어 안고 그대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내가 내는 소리도 아니였고 빗소리도 아니였다. 나는 순간, 순간 타이치 상이 울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 소리는 확실히 우는 소리였다. 어깨에서 뜨거운 느낌이 났다. 정말로, 정말로 울고 있는 것였다.
 "울지 말아요" 라고 말했지만 멈췄던 눈물은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서로 울지 말라고 얘기했지만 어느 누구도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타이치 상은 소리없이, 나는 크게 소리내어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고 있었는지라 비가 더 거세게 내리는 것을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다.
"비 많이 오네" 타이치 상은 잔뜩 메인 목소리로 말했다.
 발 밑에 떨어진 우산이 보였다. 어쩌면 우산이 필요없게 되는 때는, 비 맞는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때는 해가 뜰 때가 아닐까...
 "그냥 내버려 둬요. 다 내리고 나면 해가 뜰 거니까요."
  이게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위로였다.
 

'Short'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합작/다이타케] 未定  (0) 2016.02.08
[가부몬+고마몬] 발견  (0) 2016.01.21
[전력 12주차] Rolled Down Again  (0) 2015.07.18
[디지몬/다이타케(?)] 무제  (0) 2015.06.28
[디지몬/다이타케] Mikil Rigning  (0) 2015.06.21
Posted by 금강포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