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9일
향일성유기체님께 드렸던 글
여름, 낮의 뜨거운 햇빛을 받아, 후텁지근한 밖과는 다르게 학교 안은 그래도 덥지는 않았다. 창문을 좀 열어놓으면, 바람이 조금씩 달구어진 공기를 내보낸다. 그리고, 창문에 투과되어 부서지는 빛들은 그 안을 환하게 비춘다. 평소에 느끼던 빛과는 다르게, 주위를 하얗게 덮는.
지금은 안에 아무도 없는 게 당연한 건지는 모르지만,텅 빈 복도 사이를 가로지르는 건 어색하다. 뭔가 북적거리고 그래야 될 것 같은,교실들은 흔적 없이 텅 비어있다. 다들 밖에 있겠지. 창문 사이로 들리는 소리들은, 평소에 복도에서 듣는 소리의, 그 음량을 줄여버린 것처럼 들렸다.
교실 앞, 열려있는 문 사이로 바람이 하나 스친다. 아까 전까지 땀을 좀 흘렸던 터라 그 바람은 시원하게 느껴진다. 그 바람에, 살랑살랑 커튼이 파도 치듯 흔들린다. 그 사이로 하얀 빛이, 교실을 비췄다. 아무도 없는 교실, 무언가를 빠뜨려 혼자 텅 빈 교실로 오는 건 느낌이 좀 묘하다.
그건 그 교실이, 실은 텅 비어있지 않기 때문일까. 책상에 엎드려 있는 아이. 자고 있는 건지, 아니면 그냥 쉬고 있는 건지 알 수 없게, 얼굴을 푹 묻고 가만히 있었다. 누구 자리였더라. 기억나는 건, 아까 밖에 있을 때 보이지 않았다는 것 뿐. 이제야 확실히 알 것 같았다. 금발을 가진 아이는 이 학교에 하나 밖에 없으니. 어디 있나 했는데 여기 있었구나.
어이, 작게 부르지만 미동이 없다. 자고 있나. 가까이 다가가, 그 앞자리에 앉는다. 희미한 바람에 옅은 머리가 조금씩 움직인다. 그런 모습을 잠깐동안 바라본다. 타케루, 다시 불러보고 침묵으로 답을 돌려받는다. 그 이상한 적막감에 눈을 감고, 한창을 그렇게 있었다.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울먹이는 소리. 아무리 울음을 참고, 막아보려 해도 어쩔 수 없이 흘러나오는 울먹임. 그 소리에 눈을 뜬다. 어깨가 들썩이면서 소리를 죽이고 있던 것을, 아까 전에는 알지 못했는지. 울어? 의미없는 말. 내가 그걸 모를 리도, 그 말에 답할 리도 없다. 울고 있구나. 어쩌면 그대로 모른 척하는 게 나을지.
타케루가 울 때도 있었나. 언젠가 눈물을 흘리는 건 본 것 같다. 타케루는 언제나 표정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런 미소에, 되려 기분 나쁘기까지 할 정도로, 가볍게 그 표정을 얹었다. 기분 나쁜, 그 기분이 괜한 게 아니라는 건 처음에는 몰랐지만, 그런 느낌이 언젠가부터, 아주 서서히 다가왔다.
착각일까?
어렸을 때는 잘 울었다고, 들었던 것 같다. 그 모험 이야기를 하면서 잠깐 지나갔던 말들이 스친다. 잘 울면, 그만큼 잘 웃고 그랬을 거야. 눈물은 참다보면 쌓이고, 한번 울기 시작하면 주체할 수 없이 쏟아지니까, 아마 그랬을 거다. 어느 순간 흘러넘쳐서 막을 수 없이 흘러나와서 그렇게 엎드려 있었을 거야. 울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흘리던 웃음들은 이제 바닥이 났을 테지.
그런 그를 어떻게 달래야 할 지. 이런 건 한번도 해본 적이 없어 장시 망설인다. 손을 얻으려다 잠시 멈추고, 다시 고민한다. 이렇게까지 머리가 아픈 적이 있 었나. 처음 우는 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이리저리 혼란스럽다. 그럴 때는...
타케루, 말하자 조금, 얼굴을 든다. 푸른 눈 밑으로 눈물이 흐론다. 슬픈 빛을 띄는 눈은, 아무런 것에도 초점을 맞추지 못하는 듯하다. 있다가 밖으로 와. 그렇게 말하고 일어난다. 어쩌면 위로보다는 그냥 내버려두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대뜸 뭐라도 하다가, 잘못되면 안 되니까.
다이스케 군,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돌아보면, 그 흐릿한 눈과 마주친다. 울음으로 이지러진 표정을 보기는 싫어, 눈을 일부러 돌린다. 그렇게 울고 있으면 나는 뭐가 돼. 더듬거린다. 그렇구나. 타케루는 말한다. 환한 빛 사이로 젖은 눈이 반짝이고 있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머리는 이미 터져버린다.
다시 그 앞에 앉아 묻는다. 타케루, 얼마나 그러고 있었던 거냐. 다 나가고 나서.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거야? 응. 난 언제나 말에는 약했다. 생각보다는 몸이 앞서는 타입이 그런, 생각이 많은 아이를 위로할 수는 없으리라. 언제나 그를 대할 때는 감정이 앞서니까. 그런 이상한 감정으로 그를 대한다면, 그러면...
입이 닿았다.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갑자기 피어오른 감정이 움직인다. 전부터 이상했던 느낌들은, 어느순간부터 타케루에게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었을 지, 나조차 그런 감정들을 모르고 있었다면, 타케루도, 자기가 왜 우는 지 모를 거다. 우리는 서로 바보처럼 행동하고 있는 건지.
한참, 영원한 시간이 흐른 것처럼 느껴진다. 황급히 입을 때고 급하게 자리에 일어난다. 당황한 눈을 뒤로 하고, 그렇게 울면 나처럼 된다. 말하고 밖을 나서버린다.
나처럼 못 말한다고, 아무것도. 지금 어떤 기분인지, 너에게 느끼는 그런 것들이.
2월 5일
식이 끝나고, 주변을 돌아보면 수많은 사람들─부모님과 함께 밖을 나서는─사이에 홀로, 가만히 서 있는 자신을 마주한다. 친구들과 악수를 하고, 그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는 것을 본다. 형은 아직인가. 한 몇 주 전부터 꼭 졸업식에 오겠다고 말하는 걸 웃으면서 그냥 넘어갔었는데, 이른 아침 문자로 꼭 가겠노라고 당부를 하더니만, 식이 끝난 지금도 모습을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오늘도 혼자 집으로 가야할 것만 같았다.
항상 있는 일이었다. 중학교 때도 그랬지만, 혼자서 식을 치르는 건 익숙한 일이었다. 부러웠던 감정들도 이제는 많이 무뎌져, 지금, 별로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는다. 찾아오는 아이들에게, 일일히 축하한다고, 말하면서, 집으로 돌아갈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히카리 짱은 타이치 상과 같이 있을까. 다이스케 군은 가족들과 같이 있는 것 같다. 아까 식 전에 잠깐 만나 미리 말을 좀 나누었지마는... 뭐, 지금은 신경 쓸 겨를도 없겠지만.
"타케루!"
다이스케 군의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면, 벌써 앞까지 달려와 잔뜩 숨찬 얼굴을 하고 있다.
"어, 아직 야마토 상은 아직 안 왔나?"
"못 올 것 같아 보이는데. 형이 네게도 말했어?"
"아까 타이치 상하고 얘기하다가. 아, 참. 졸업 축하해!"
무작정 손을 내미는 다이스케 군에게, 웃으면서 손을 힘껏 잡고 흔든다. 해맑은 웃음에 조그만 웃음으로 답한다. 꽉 잡은 손 사이로, 들뜬 기운 같은 것이 느껴진다. 다이스케 군은 주변을 몇번 돌아보다가, 의아한 듯한 표정을 짓는다.
"아아, 타이치 상네는 가버린 건가?"
"어, 그런 것 같아. 지금 다들 나갈 때니까."
"헤, 아쉽네. 얘기 좀 하려고 했더니."
지금쯤이면 거의 다 빠져나갔을 것이다. 웅성거리던 소리는 사라졌고, 붐비던 사람들도 이제 다 밖으로 자리를 옮길 차례였다. 더 많은 얘기를 위해서.
"다이스케 군, 이제 우리도 나가봐야지."
"아, 맞다! 음... 그러고보니 다 나갔구나."
"이제 가야지, 너도."
다이스케 군의 등을 밀면서 문으로 발을 옮긴다. 한참 가다가, 문 바로 앞에서 다이스케 군을 돌아보면서 말한다.
"아, 참. 있다가 시간 있어?"
"응? 언제? 딱히 약속은 없어."
"만약 야마토 상 안 오면, 있다가 낮에 만날래? 집에만 있으면 안 되니까."
"가족들하고는?"
"글쎄다... 상관 없어. 그때쯤이면 다 끝나겠지, 뭐."
멋쩍게 웃는 다이스케 군의 뒤쪽으로 허겁지겁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생각해보면, 어떻게 보내든 의미가 있을 시간이지만─그게 가족들과 보내든, 다른 사람들과 보내든 간에─다이스케 군은, 의도치않게 좋은 방향으로 내 시간을 이끌어 주었다. 좀 더 의미있는 기억으로. 방금 한 약속은 순식간에 깨져버렸지만, 이번에는 먼저 약속을 잡아볼까 생각한다.
"다이스케 군, 갑자기 약속이 생긴 것 같아서. 나중에 만나자."
"응, 좋은 시간 보내."
"너도."
졸업 축하해. 다이스케 군.
2월 7일
같은 하늘 아래, 라는 말을 많이 듣지만 같은 하늘 아래에 있는 시간보다는, 내가 더 아래에 있는 시간이 더 많은 것 같다. 일이라는 게 어쩔 수 없지마는, 허전한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다. 많이, 어렸을 때가 생각난다. 아버지를 많이 보지 못했던. 아이들에게 같은 경험을 시키고 싶지 않았지만, 이제야, 그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기도. 어쩔 수 없다는 말로 주로 포장하는, 그 안에 꾹꾹 눌러담은 미묘한 감정들을, 조금씩 배우고 있었다.
끝내지 못한 작업들 때문에, 조금 늦게 잠을 청하는 때였다. 늦은 밤, 하늘은 새까맣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희미하게 반짝이는 점 몇 개. 그 옆, 그 옆에는 수많은 별들이 보일 것이다. 환한 불빛에 묻혀 보이지 않는 것일테니. 내가 그 위를 볼 수 없는 것처럼, 그 위에서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갔던 여행에서 보았던 하늘에 수놓은 별들을 기억한다. 그 별들을 머리속에 조금씩 담아두고, 하늘이 보고 싶을 때마다 꺼내어 비춰보고 싶었다. 지금, 조금 더 그 별에 가까이 있을, 언젠가 같이 있게 될 날을 생각하면서, 그 별을 닮은 무언가를 생각해낸다. 그에게 어울리라, 생각하면서, 선 하나를 다시 긋는다.
2월 8일
눈을 떠보니까 이곳이다. 아까 전 뭔가에 말려 들어가 정신을 잃은 게 마지막이었는데. 눈 앞에 보이는 건... 응? 잡힌 건가? 그 녀석이, 굳이 그 혼란 속에서 날 잡아간 지는 몰라도, 생각해보면 정말 기분이 나빠서 미칠 지경이었다. 젠장, 손은 왜 묶여있어서.
다행히 입에는 뭘 안 붙여놔서, 뭐라 말할 수는 있었다. 잡아놓을 거면 입, 손, 발을 놔두면 안 된다는 건, 바보라고 만날 듣는 나도 알고 있는 거였다. 설마, 그런 식으로 허점을 드러낼 줄은.
야! 뒤에서 보이는 녀석을 부른다. 당연히 대답은 없다. 뭘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알 수는 없다. 이 방은 어디에 있는 거지. 기지라면 꽤 넓을 텐데, 만약 어떻게 해서 여길 나간다 해도, 출구가 어디인지는 모르는... 머리가 지끈 아파온다.
녀석의 관심을 끌 방법이 있나. 뚫린 거라고는 입 밖에 없는데, 그냥 막 소리를 질러대면 될까? 정신을 차리면 어느새 내 입에서는 무슨 이상한 말들이 나오고 있다. 생각나는 대로 막 질러대면서, 저 녀석이 어떤 반응을 보일 지 궁금했다. 재미있게도 녀석은 귀를 틀어막다가 뭐로 막으려고 하기는 커녕, 이쪽으로 와 멱살을 잡는다. 좋았어. 그러면...
"벌레같은 자식.. 닥치지 못 해?"
그런 소리를 들으니 뭔가 웃음이 터져나온다. 진짜로, 그 표정이나 목소리가 너무나도 진지해서, 누가 들어도 웃음이 나왔을 것이다. 계속 벌레를 외쳐대는 녀석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 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지금, 너무 웃겨서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얼른 빠져나가기는 해야겠는데...
2월 24일
오늘따라 켄은 무척 수척해보였다. 이유를 물어봐도 말을 돌리면서, 대답하려 하지 않았다.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었을까, 나는 평소보다 조금 일찍 켄을 돌려보냈다. 밤에, 잠깐 미야코랑 문자를 하다가 오늘이, 켄의 형─이름은 까먹어 버렸다─의 기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걸 모르고 있었냐며 따지는 미야코에게, 네게만 알려준 것 아니냐며 다시 따졌다. 대화가 끝나고, 침대에 누우면서 둘에게 조금 미안하게 군 건 아닐까 생각했지만, 아무도 내게 이유를 알려주지 않은 걸, 내 탓으로 돌릴 수는 없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켄은 죽은 형을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았다. 서로 친했는지는 모르지만, 나와 누나, 아니 누님보다는 훨씬 친했을 것이다. 그 형이라는 사람이 어땠는 지는 몰랐다. 애초에 듣지를 못했던 것 같다. 아니, 알려고 노력하지 않은 걸까.
어찌보면 켄에게, 그런 걸 집요하게 물어볼 용기가 없었다. 굳이 알지 않아도 될 것 같았고, 알아봤자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아서, 그렇게 신경쓰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하나하나씩 무시해 버리면 언젠가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어지는 게 아닐까 싶었다.
듣고 싶었던 게 있었다. 너무도 많아서, 그걸 온전히 다 이해할 수 있을 지는 모르겠다. 언제나 켄은, 아픈 게 더 많으니까, 그것들을 조금 나누고 싶었다. 그런 아픔 쯤은 가지고 있어도 될 것 같았다.
그 사이에는 내가 모르는 너가 있을 것이다. 내가 알아야 하는 뒷모습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