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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년이 다 돼가도록, 이 도시의 길이 걸어도 끝이 없을 거라는 느낌을 계속 받았다. 노래에서 항상 나오는 ‘처음 가보는 거리’라는 구절을 되내이면서, 익숙한 거리를 걸어도 왠지 길을 잃은 것 같은 착각에 빠지면서, 어쩌면 이 도시라는 게 자신의 앞에, 주위에, 공기처럼 둘러쌓여 있었음에도, 바라보는 눈 앞에서 멀리 멀리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무거운 생각을 버리고 가벼워진 기운을 오랜만에 가지자, 그 덜어낸 무게만큼 바르게 어딘가로 휩쓸릴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변화는 느낄 수 있을만큼 그 속도로, 빠르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게 움직였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부터 모든 것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기 시작하고 세상이 거대한 컨테이너처럼 변한 것 같았다. 누구든지 가는 방향과 반대로 움직이는 레일. 전속력으로 뛰어도 제자리에 서 있는 것만 같았다.
 봄은 느리게 시작되었다. 4월에도 눈이 내릴 정도로 낢씨가 변덕스럽기는 했지만 시기상으로는 어쨌든 그러했다. 어딘가에서는 막 피어나는 꽃을 볼 수 있을 것이고, 그 자리에는 많은 곤충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비, 벌, 그밖에 이름 모를 곤충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수많은 꽃들. 움츠러든 겨울이 녹고 다시금 무언가를 시작하려고 하는 때가 한발자국 다가왔다.
 늦여름의 기억이 어느 것보다 크게 다가오지만, 막 봄으로 접어들던 봄방학의 일들도 이맘때면 어렴풋이 생각이 났다. 디아블로몬 때문에 벌어진 소동들. 집 안에서, 아니면 오다이바를 뛰어다니며 벌인, 어떻게 보면 전쟁 게임 같이 느꼈던 사건들도 어떻게 보면 봄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시작을 거창하게 벌이는 것은 이제는 진저리가 나지만, 이전의 사건이 일단락되고 처음 맡는 봄은, 그 어느때보다도 따뜻한 날로 느껴졌다.
오다이바의 옛날 풍경들, 처음 발을 디뎠던 디지털 월드를 생각할 때가 있다. 추억 같은 건 아니었다. 그저 몸에 밴 습관처럼, 흔적을 더듬는 것 같은 느낌이였다. 수년 전 파괴되었던 그 자리가 눈에 갑자기 어른거릴 때도 있었다. 생각하기 싫었지만 굳이 그 형상을 떨쳐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흔적을 뒤덮고 있던 건 디지털 월드를 날아다니는 빛나는 나비들이었다. 수년동안 여러 일을 겪으면서 사라졌을 줄 알았지만, 그것들은 어디에서나 하늘을 날아다녔다. 이상하게도 나비들이 나무에 붙어있거나, 어딘가에서 쉬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저 떨어지는 일 없이 모여서 하늘을 날아다녔다.
 미국에서 언젠가 수많은 나비떼를 본 적이 있다. 그 나비들은 멕시코로 날아갔다가, 시간이 지나서 다시 자기들이 살던 캐나다로 돌아간다고 들었다. 그 먼 거리를 왕복할 때,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건 아니였다. 돌아오는 중간에, 그 나비들은 알을 낳고 죽고, 그 태어난 나비들이 다시 여행을 떠난다. 그렇게 다시 캐나다로 돌아올 때쯤이면, 돌아온 나비는 처음 떠난 나비의 고손 정도 된다고 한다.
 처음으로 떠난 여행에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건 그것이 아주 작은 여행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의 사람들은 아주 길고 먼 여행을 떠나야할 지도 모른다. 해가 갈수록 거대한 수로 불어나고, 언젠가는 모든 사람들이 그 여행에 동행할 것이다. 거대한 목표를 사람들이 이루어야 한다면, 아마 나의 세대에서는 이루지 못할 것이다. 끊임없이 여행길의 기억들을, 살아온 증표들을 물려주면서, 수십년이 흘러 처음에 있던 곳으로 새로운 세대가 돌아올 때쯤이면 이 세상은 어떻게 바뀌어 있을까.
 그 나비들은 특별하게 방향을 가리키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닐 것이다. 그저 몸 속에 방향을 알려주는 것이 태어날 때부터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어디로 흘러갈 지 알 수 없다. 알 수 없어도 결국은 어딘가로 향할 것이다. 날아가는 나비떼에 섞여 날아가다가, 언젠가는 새롭게 떠나는 나비들에게 손을 흔들어 줄 것이다.
 안녕 안녕 나비들아. 우리가 가던 길을 다시 가 줘, 하면서.



 와다 코지和田光司님을 기리며. 2017년 4월 3일, 1년 째가 되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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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금강포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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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스케+켄]

Scribble/Stuff 2016. 12. 4. 22:47

2015년 12월 31일

언젠가 열렸던 켄 오른쪽 합작 때 참여하려고 썼던 것입니다. 그때 주최자 분께서 잠수를 타시는 바람에 다들 합작한 부분을 올렸었지만, 저는 급하게 쓰기도 하였고, 당시에 제대로 글을 쓸 수 없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올리지는 못했었습니다.

지금 글을 정리하다가 한번 올려봅니다.




.


우연히

위로, 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다리 위, 머릿속에서 정리되지 않는 조각조각 끊겨 맞춰지지 않는 생각들을 두고, 조금씩 찬 공기 위로, 타오르지 않는 횃불을 든 동상을 본다. 모습을 본따 세운 여신의 형상. 이 반대쪽에 있는 그것과는 다른, 복사본 하나.

형상 하나를 본다. 누군가를 본따 만든 나의 모습, 그것이 산산히 부서지는 걸, 거울 여러 개가 깨져 그 파편으로 온 몸이 찔리는 것을 본다. 갑자기 그런 악몽을 꾸었다. 긴 잠에 빠져든, 어느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던 시기에는 보이지 않았던 무언가가, 가만히 눈을 감으면 눈앞에 어른거린다. 아무런 소리 없이, 귀가 멎을 듯, 느리게, 아주 천천히 재생되다가 끔찍한 소리와 함께 깨어난다.

금속성의 소리, 환청인 줄을 알면서도 크게 놀란다. 이제껏 세워 놓은 탑들을 망치로 때릴 때에도 그런 소리가 났었나. 언젠가 그런 적이 있었다. 이유없이, 딱딱한 무언가를 하나 들고 탑을 향해 던진 적이 있었다. 꽝. 그 소리와 함께 들리는 비명소리는 의식하지도 않은 채 그 커다란 공명을 즐겼다. 그때는, 분명 그 모든 소리들을 즐기고 있었다. 햐얗게 울부짖는 소리들이 나를 책망하고, 짖밟는다.

모조리 다시 되돌려 놓을 수 없을까. 그 책임은 전적으로 한쪽을 향해 손가락질한다. 어쩌면 모든 것들이 나, 하나에서 시작되었는지도. 그렇다면, 수습하는 것도 혼자서 해야 할 지도. 이미 다들 알고 있는 지금, 결국 혼자 하는 일은 아니게 되버렸지만서도, 일이 점점 커지는 상황에서, 혼자 감당할 수 있을 지도, 더욱 짙게 그림자가 드리우는 건.

어두웠던 것이 조금은 밝아지고 있다. 벌써 아침인가? 이리저리, 어디까지 걸어온 건지도 알 수 없는데, 얼마나 난간에 몸을 대고, 그 위를 바라본 건 지도 누낄 수 없다. 천천히 부는 바람에 조금은 더 머물고 싶어, 눈을 감는다. 누군가가 어지럽혀 놓은 것 같이, 난잡한 기분.

마침,

—어여.

왠일인지 오늘은 좀 빨리 깨서, 주변이나 돌아볼까 하고 밖에 나왔건만, 마침 지나는 길, 그 다리에서 그 애를 보니 조금은, 반가운 느낌이 든다. 그 애에게서 묘한 기분이 드는 건, 아직은 좀 혼란스러운 기분이 없지 않아 있기 때문일 것이라. 의식하지도 못한 채, 자연스럽게 말을 붙이는 건 괜한 천성 같은 것일 지도.

—여기까진 어쩐 일이야?

말 없는 걸 보면 이유 같은 건 없겠지. 그냥 바람이나 쐬러, 머리가 아프거나, 잊고 싶은 게 있어서. 나도 밖에 나온 이유가 분명 있을 터인데 생각나지 않는 건. 이유 때문이 아니라 어떤, 이상한 이끌림에 뒤떠밀려 막 물을 뿜는 조난자처럼 서 있는 듯, 그 애를 보자하니, 점점 머리가 아파오는 건, 기분 나쁜 기분.

—이번에는 다리 위에서 보는 건가?

그때였나. 합류해달라고 처음 말했던 게. 그 시도가 괜찮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뭐, 무작정 달려들어서 그렇게 말하면 무안할 테니, 다른 아이들 이야기는 듣지도 않고 그랬던 게 잘못된 건지, 나 자신도 녀석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지, 받아들일 수 있을 지. 좀 더 신중했어야 했는데. 언제나 이런 식이였지. 심각해질 지도 모르는 일을 너무도 가볍게 보는 건. 눈 앞에 있는 것 밖에 안 보이는 걸 어찌해야 할 지.

—안 들리는 거야?

뭘 잘못 먹었는지 말해도 듣지를 않는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골똘해진 걸까. 고민이야, 내 것보다는 몇 배 넘게 쌓여 있겠지만, 고민이라고는 별로 해보지도 않은 머리가 그 고민들을, 제대로 느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말할 사람도 없겠지. 언제나 그것들을 아래로, 아래로 쌓고, 곱씹고 있는 것을 상상해본다.

문득, 녀석이 누르고 있는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말해줄 리는 없겠지만, 만약 말해준다 해도, 그 말들을 침묵으로 삭일 수 있을 지 모르지만, 그저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무언가 더 나아지지는 않을 지. 그러면 좀 기분이 후련해질 지.

아직은,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닌 것 같지만.

—야!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옆을 보면, 익숙한, 밝은 얼굴이 보인다. 이번에도 찾아온 건지. 뭔가 떠오르는 게 없어서 가만히, 그 얼굴을 바라만 보았다.

—정신 차리라고. 그렇게 얼빵하게 있지 말고.

그렇게 말하고는, 그 애는 어깨에 손을 올려 토닥인다.

—잘 해보자고.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러고 돌아서는 그에게 말한다.

—모토미야 군.

그 애는 뒤돌아보면서 다시, 말한다.

—나중에 봐. 그때 얘기하자고.

가는 모습을 보면서, 조금은 이야기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직은 때가 아닌 걸까. 내가 그 아이를 믿을 수 있을 지 알 수는 없을까. 정말로, 그 애는 날 믿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만큼 내가 그 애를 실망시키지 않도록 할 수 있을 지.

언젠가는 알 수 있을까.

정말?


Posted by 금강포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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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5일


1.
해가 조금 서쪽으로 기울었다. 자전거를 푸는 히카리 짱을 잡은 건 행운이었다. 시간이 맞아서 같이 하교하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끝나는 시간이 달라서 자주 엇갈리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히카리 짱이 자전거를 두는 곳을 하교 때마다 항상 둘러보고는 했다. 그곳에 자전거가 없으면 그냥 가고, 만약 있다면 그곳에서 기다리기도 했다. 조금 근처에 있다가, 마치 우연히 시간이 맞은 것처럼 다가갔었다. 그렇지 않는 한, 오늘처럼 시간이 딱 맞았던 적은, 굉장히 적었던 것 같다.
 매일 걷는 단조로운 길임에도, 소소한 이야기들이나 작은 화젯거리들, 그런 와중에 한번씩 얼굴에 비추는 웃음들을 보면 괜히 기분이 좋았다. 히카리 짱이 잡은 자전거가 천천히 굴러가는 소리를 들으면서, 언젠가 자전거가 하나 있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같이 자전거를 탄다면 괜찮을 거라고, 어쩌면 자전거를 탄 채로 공원까지 둥만의 경주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에 입술이 조금 올라가면, 이상한 상상을 하는 표정을 본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히카리 짱에게, 대충 이상하게 둘러대고 만다.

2.
 한창 열대야라고, 많이들 밤까지 더위를 호소하는 날씨였지만, 새벽 공기는 의외로 굉장히 차가웠다. 여름밤의 공기는 어느때와 다를바 없이, 똑같이 추웠고 먹먹했다.
 어떤 기억들이 있었던 것 같았다. 그건, 그것이 존재했다는 흔적만 남긴 채 어디로 가버렸는지 알 수 없었다. 시작과 끝, 그 중간에 어느 단편이 빠져있었다. 아마 그 기억에는 나에게 가장 중요한 무언가가 있었을 것이다.
 알고 있었다. 사라진 기억 속의 누군가는 내게 언젠가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모든 게 혼란스러워지면, 가끔은 가장 중요한 것을 까먹게 된다고, 흘려말한 적이 있었다.
 난 지금, 끊임없는 혼돈에 갇혀있었고 어쩌면 나는 가장 중요한 것들을 차츰차츰 잃어버리고 있었다. 어린 시절 만난 깨달음마저도.
 공기는 차갑고, 그 차가운 바다 속으로 뛰어들고 싶을 정도로 머리가 아팠다.

3.
 같은 날이었을 것이다. 동생의 생일이랑, 그 녀석 부모님의 결혼기념일. 그때는 그저, 우연한 상황에서 우연히 만난 것이였지만, 그건 꽤나 강렬한 기억이었고, 그곳에서 만났던 모든 것들을, 똑똑히 기억할 수 있었다.
 신야의 선물을 들고 플랫폼에 서 있었다. 열차라는 녀석은 갑자기 연착을 하는 바람에 꽤나 오랜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지루한 시간에는 잠시 플랫폼 주변을 돌아보거나, 아니면 바로 앞의, 반대쪽으로 가는 플랫폼을 바라보는 게 다반사였다.
 플랫폼은 한산했다. 사람들은 별로 없고, 때문에 멀리서도 대충 모습을 알아볼 수 있었다. 어쩌면 사람이 없어서, 그 녀석을 그 근처에서 알아봤는 지도 모른다. 뭐, 그렇게 멀리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예전처럼 두건 같은 건 쓰지 않았지만, 그 묶은 긴 머리는 여전했다. 손에 들려있는 꽃다발이라면, 역시 부모님께 드리는 것이겠지. 그때 이후로, 교복을 입을 때까지 보지 못했다니, 기막힌 우연이다.
 그러다 문득 그 녀석과 눈이 마주치면, 오랜만이라는 눈빛을 조금 담으며 미소를 지는 걸 뒤늦게 알아차린다.

4.
 누군가를 피하는 건, 그 사람이 싫어서일 수도 있지만, 그 사람에게 죄책감을 가져서 피해다니는 거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적은 없었지만, 나를 누군가가 피하려 하고 있다는 생각은, 최근에 몇번 한 것 같다.
 그 사람이 내가 존경하는 사람이라면, 난 그 사람에게 어떻게 해야할 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그런 사소한 이유로 죄책감을 느낀다면, 난 살면서 한 수백번을 미안했을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많이 절망하기도 했고, 순간 원망하기까지도 했지만, 처음부터 그런 건 신경쓰지도 않았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그때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것이 오히려 독이 될 줄은.
 결국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 올 것이고, 난 처음으로 그 이야기를 꺼내게 될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고글을 주었다는 사실만은 잊지 않았으니, 당신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다고. 난 그때 끊임없이 당신을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당신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고.

5.
 야마토를 따라 계단을 올랐다. 늦은 밤 옥상은 아직 불을 끄지 않은 집들이 네모난 모양을 만들었다. 위를 쳐다보면, 별은 하나 보이지 않고, 밝은 점 한두개만 박혀있다. 야마토는 그 점들이 인공위성이라고, 사람들이 하늘로 쏘아올린 것이라고 말했다. 인간은 별을 직접 만들어 쏘아올리는 것일까? 아마 이렇게 말하면 야마토는 아니라고 하겠지만.
 야마토는 난간에 기대어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야마토를 불렀을 때, 뒤돌아보면서 춥지 않냐고 물었다. 춥지 않다고 얘기하자, 야마토는 그곳에서 주저 앉았고, 한동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야마토의 오른손에는 하모니카가 있었다. 지금은 많이 긁히고 낡았지만, 그건 그때와 같은 소리를 낼 것이다. 문득 야마토가 불던 노래들이 생각났다. 아마 그런 노래들은 슬플 때 더 자주 불었던 것 같다.
 그 옆에 앉아 똑같이 하늘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눈을 감고, 옛날의 노래들을 계속 생각해내고 있었다. 야마토가 천천히 음을 잡고, 그 노래들을 천천히 불었다. 그 소리를 들으며, 기억을 되감아보았다. 야마토와 처음 만나서, 지금까지 있었던, 그런 별 같은 기억들을.

6.
 어쩌면 단순히 같이 있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예전부터 해왔던 노력들이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한 거였을 지도 모른다. 타케루 상은 어떠한 사람일까, 하는 호기심은 조그레스를 성공한 그때 잠시 잊어버렸을지도 몰랐다. 그랬기 때문에 아직도 완벽히 알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의문들을 제쳐두고, 이제 같은 교복을 입고 같은 학교에 다니게 된 이때에, 난 다시 그 풀리지 않은 나 자신의 질문에 답을 구할 때였다. 이번이 아니면 난 다시 3년을 기다려야할 테니까. 입학하고 나서 처음 만났을 때의 짓던 웃음에 다시, 이번에는 타케루 상을 어느정도 알 수 있게 될 거라고 작은 희망을 가지게 된다.
 만약 다 알게 된다면, 그때 내릴 결론은 어떻게 될까.

7.
 "같이 쓰고 갈래?"
 비가 오고 있었고, 문 앞에서 만난 야마토에게 난 작게 물었다. 야마토는 꺼내려던 걸 황급히 다시 가방에 넣고, 작게 끄덕였다. 방금 전 급하게 집어넣었던 것이 뭔지는 모르지만, 아마 겉옷이나 다른, 가릴 것이었으리라 생각했다.
 야마토가 우산을 들고 있으면, 항상 그 바깥쪽 어깨가 다 젖은 것을 보았다. 대신 들겠다고 여러번 그랬지만, 키 차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우산을 높이 들어야했기에, 결국은 팔이 아파서 야마토가 다시 낚아채버리고 만다. 그러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웃음을 지었고, 다시 걸어가는 때가 많았다.
 둘이서 한 우산을 쓰면, 자연스럽게 펼친 우산 안으로 들어가려고 몸을 움추린다. 그러다가 서로가 너무 가까이 있다는 걸 깨닫고는 깜짝 놀라서 얼굴을 붉힐 때도 있었다. 비오는 날에는 항상, 그런 일들이 자주 일어났다.
 어쩌면 왜 그러는지, 지금 알아버린 것 같았다. 조금 열린 가방에서 접이식 우산 손잡이가 살짝 튀어나와 있었다. 그걸 보고 피식 웃은 것을, 아마 야마토는 모르는 것 같았다.

8.
 타이치는 가끔 연습실에 찾아와서는 내가 연습하는 것을 계속 지켜보았다. 연습하는데 계속 방해가 되서, 이어폰을 끼고 연습을 해도 그 바라보는 시선이 괜히 신경이 쓰여서, 그날 연습은 죄다 망칠 때도 많았다.
 언젠가는 녹음기를 틀어놓고 데모를 녹음할 때였다. 녀석이 갑자기 찾아와서 테이크 하나를 날려버렸다. 화내는 것을 무시하는 듯 옆에 앉아서 장난끼가 넘치는 목소리로 말한다.
 "노래 연습하고 있었냐?"
 그러고는 가사를 쓴 종이를 빼앗고는 다시 말한다.
 "이거 한번 불러봐도 될까?"
 "그 전에 너 음치 아니었어?"
 지금은 아니라며 계속 하자는 것을 막을 수는 없어, 어쩔 수 없이 기타를 켰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타이치는 노래를 못 부른다. 언제는 음을 다 외웠다면서, 음이 하나씩 틀리고 내려가고 난리가 아니었다. 그 부분에서 조금씩 화음을 넣었고 여차저차 노래 하나가 끝났다.
 녹음 버튼을 누르자 타이치는 그제야 내가 녹음중이었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그거 녹음한 거였어?"
 "앞으로 이거 가지고 3년은 놀릴 거다, 이 음치야."
 아직까지도 그 테이프를 가지고 있다고 하면, 그 녀석은 날 죽이려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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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9일


향일성유기체님께 드렸던 글


여름, 낮의 뜨거운 햇빛을 받아, 후텁지근한 밖과는 다르게 학교 안은 그래도 덥지는 않았다. 창문을 좀 열어놓으면, 바람이 조금씩 달구어진 공기를 내보낸다. 그리고, 창문에 투과되어 부서지는 빛들은 그 안을 환하게 비춘다. 평소에 느끼던 빛과는 다르게, 주위를 하얗게 덮는.

지금은 안에 아무도 없는 게 당연한 건지는 모르지만,텅 빈 복도 사이를 가로지르는 건 어색하다. 뭔가 북적거리고 그래야 될 것 같은,교실들은 흔적 없이 텅 비어있다. 다들 밖에 있겠지. 창문 사이로 들리는 소리들은, 평소에 복도에서 듣는 소리의, 그 음량을 줄여버린 것처럼 들렸다.

교실 앞, 열려있는 문 사이로 바람이 하나 스친다. 아까 전까지 땀을 좀 흘렸던 터라 그 바람은 시원하게 느껴진다. 그 바람에, 살랑살랑 커튼이 파도 치듯 흔들린다. 그 사이로 하얀 빛이, 교실을 비췄다. 아무도 없는 교실, 무언가를 빠뜨려 혼자 텅 빈 교실로 오는 건 느낌이 좀 묘하다.

그건 그 교실이, 실은 텅 비어있지 않기 때문일까. 책상에 엎드려 있는 아이. 자고 있는 건지, 아니면 그냥 쉬고 있는 건지 알 수 없게, 얼굴을 푹 묻고 가만히 있었다. 누구 자리였더라. 기억나는 건, 아까 밖에 있을 때 보이지 않았다는 것 뿐. 이제야 확실히 알 것 같았다. 금발을 가진 아이는 이 학교에 하나 밖에 없으니. 어디 있나 했는데 여기 있었구나.

어이, 작게 부르지만 미동이 없다. 자고 있나. 가까이 다가가, 그 앞자리에 앉는다. 희미한 바람에 옅은 머리가 조금씩 움직인다. 그런 모습을 잠깐동안 바라본다. 타케루, 다시 불러보고 침묵으로 답을 돌려받는다. 그 이상한 적막감에 눈을 감고, 한창을 그렇게 있었다.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울먹이는 소리. 아무리 울음을 참고, 막아보려 해도 어쩔 수 없이 흘러나오는 울먹임. 그 소리에 눈을 뜬다. 어깨가 들썩이면서 소리를 죽이고 있던 것을, 아까 전에는 알지 못했는지. 울어? 의미없는 말. 내가 그걸 모를 리도, 그 말에 답할 리도 없다. 울고 있구나. 어쩌면 그대로 모른 척하는 게 나을지.

타케루가 울 때도 있었나. 언젠가 눈물을 흘리는 건 본 것 같다. 타케루는 언제나 표정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런 미소에, 되려 기분 나쁘기까지 할 정도로, 가볍게 그 표정을 얹었다. 기분 나쁜, 그 기분이 괜한 게 아니라는 건 처음에는 몰랐지만, 그런 느낌이 언젠가부터, 아주 서서히 다가왔다.

착각일까?

어렸을 때는 잘 울었다고, 들었던 것 같다. 그 모험 이야기를 하면서 잠깐 지나갔던 말들이 스친다. 잘 울면, 그만큼 잘 웃고 그랬을 거야. 눈물은 참다보면 쌓이고, 한번 울기 시작하면 주체할 수 없이 쏟아지니까, 아마 그랬을 거다. 어느 순간 흘러넘쳐서 막을 수 없이 흘러나와서 그렇게 엎드려 있었을 거야. 울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흘리던 웃음들은 이제 바닥이 났을 테지.

그런 그를 어떻게 달래야 할 지. 이런 건 한번도 해본 적이 없어 장시 망설인다. 손을 얻으려다 잠시 멈추고, 다시 고민한다. 이렇게까지 머리가 아픈 적이 있 었나. 처음 우는 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이리저리 혼란스럽다. 그럴 때는...

타케루, 말하자 조금, 얼굴을 든다. 푸른 눈 밑으로 눈물이 흐론다. 슬픈 빛을 띄는 눈은, 아무런 것에도 초점을 맞추지 못하는 듯하다. 있다가 밖으로 와. 그렇게 말하고 일어난다. 어쩌면 위로보다는 그냥 내버려두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대뜸 뭐라도 하다가, 잘못되면 안 되니까.

다이스케 군,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돌아보면, 그 흐릿한 눈과 마주친다. 울음으로 이지러진 표정을 보기는 싫어, 눈을 일부러 돌린다. 그렇게 울고 있으면 나는 뭐가 돼. 더듬거린다. 그렇구나. 타케루는 말한다. 환한 빛 사이로 젖은 눈이 반짝이고 있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머리는 이미 터져버린다.

다시 그 앞에 앉아 묻는다. 타케루, 얼마나 그러고 있었던 거냐. 다 나가고 나서.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거야? 응. 난 언제나 말에는 약했다. 생각보다는 몸이 앞서는 타입이 그런, 생각이 많은 아이를 위로할 수는 없으리라. 언제나 그를 대할 때는 감정이 앞서니까. 그런 이상한 감정으로 그를 대한다면, 그러면...

입이 닿았다.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갑자기 피어오른 감정이 움직인다. 전부터 이상했던 느낌들은, 어느순간부터 타케루에게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었을 지, 나조차 그런 감정들을 모르고 있었다면, 타케루도, 자기가 왜 우는 지 모를 거다. 우리는 서로 바보처럼 행동하고 있는 건지.

한참, 영원한 시간이 흐른 것처럼 느껴진다. 황급히 입을 때고 급하게 자리에 일어난다. 당황한 눈을 뒤로 하고, 그렇게 울면 나처럼 된다. 말하고 밖을 나서버린다.

나처럼 못 말한다고, 아무것도. 지금 어떤 기분인지, 너에게 느끼는 그런 것들이.




2월 5일


 식이 끝나고, 주변을 돌아보면 수많은 사람들─부모님과 함께 밖을 나서는─사이에 홀로, 가만히 서 있는 자신을 마주한다. 친구들과 악수를 하고, 그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는 것을 본다. 형은 아직인가. 한 몇 주 전부터 꼭 졸업식에 오겠다고 말하는 걸 웃으면서 그냥 넘어갔었는데, 이른 아침 문자로 꼭 가겠노라고 당부를 하더니만, 식이 끝난 지금도 모습을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오늘도 혼자 집으로 가야할 것만 같았다.

 항상 있는 일이었다. 중학교 때도 그랬지만, 혼자서 식을 치르는 건 익숙한 일이었다. 부러웠던 감정들도 이제는 많이 무뎌져, 지금, 별로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는다. 찾아오는 아이들에게, 일일히 축하한다고, 말하면서, 집으로 돌아갈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히카리 짱은 타이치 상과 같이 있을까. 다이스케 군은 가족들과 같이 있는 것 같다. 아까 식 전에 잠깐 만나 미리 말을 좀 나누었지마는... 뭐, 지금은 신경 쓸 겨를도 없겠지만.

 "타케루!"

 다이스케 군의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면, 벌써 앞까지 달려와 잔뜩 숨찬 얼굴을 하고 있다.

 "어, 아직 야마토 상은 아직 안 왔나?"

 "못 올 것 같아 보이는데. 형이 네게도 말했어?"

 "아까 타이치 상하고 얘기하다가. 아, 참. 졸업 축하해!"

 무작정 손을 내미는 다이스케 군에게, 웃으면서 손을 힘껏 잡고 흔든다. 해맑은 웃음에 조그만 웃음으로 답한다. 꽉 잡은 손 사이로, 들뜬 기운 같은 것이 느껴진다. 다이스케 군은 주변을 몇번 돌아보다가, 의아한 듯한 표정을 짓는다.

 "아아, 타이치 상네는 가버린 건가?"

 "어, 그런 것 같아. 지금 다들 나갈 때니까."

 "헤, 아쉽네. 얘기 좀 하려고 했더니."

 지금쯤이면 거의 다 빠져나갔을 것이다. 웅성거리던 소리는 사라졌고, 붐비던 사람들도 이제 다 밖으로 자리를 옮길 차례였다. 더 많은 얘기를 위해서.

 "다이스케 군, 이제 우리도 나가봐야지."

 "아, 맞다! 음... 그러고보니 다 나갔구나."

 "이제 가야지, 너도."

 다이스케 군의 등을 밀면서 문으로 발을 옮긴다. 한참 가다가, 문 바로 앞에서 다이스케 군을 돌아보면서 말한다.

 "아, 참. 있다가 시간 있어?"

 "응? 언제? 딱히 약속은 없어."

 "만약 야마토 상 안 오면, 있다가 낮에 만날래? 집에만 있으면 안 되니까."

 "가족들하고는?"

 "글쎄다... 상관 없어. 그때쯤이면 다 끝나겠지, 뭐."

 멋쩍게 웃는 다이스케 군의 뒤쪽으로 허겁지겁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생각해보면, 어떻게 보내든 의미가 있을 시간이지만─그게 가족들과 보내든, 다른 사람들과 보내든 간에─다이스케 군은, 의도치않게 좋은 방향으로 내 시간을 이끌어 주었다. 좀 더 의미있는 기억으로. 방금 한 약속은 순식간에 깨져버렸지만, 이번에는 먼저 약속을 잡아볼까 생각한다.

 "다이스케 군, 갑자기 약속이 생긴 것 같아서. 나중에 만나자."

 "응, 좋은 시간 보내."

 "너도."

 

 졸업 축하해. 다이스케 군.



2월 7일


 같은 하늘 아래, 라는 말을 많이 듣지만 같은 하늘 아래에 있는 시간보다는, 내가 더 아래에 있는 시간이 더 많은 것 같다. 일이라는 게 어쩔 수 없지마는, 허전한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다. 많이, 어렸을 때가 생각난다. 아버지를 많이 보지 못했던. 아이들에게 같은 경험을 시키고 싶지 않았지만, 이제야, 그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기도. 어쩔 수 없다는 말로 주로 포장하는, 그 안에 꾹꾹 눌러담은 미묘한 감정들을, 조금씩 배우고 있었다.

 끝내지 못한 작업들 때문에, 조금 늦게 잠을 청하는 때였다. 늦은 밤, 하늘은 새까맣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희미하게 반짝이는 점 몇 개. 그 옆, 그 옆에는 수많은 별들이 보일 것이다. 환한 불빛에 묻혀 보이지 않는 것일테니. 내가 그 위를 볼 수 없는 것처럼, 그 위에서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갔던 여행에서 보았던 하늘에 수놓은 별들을 기억한다. 그 별들을 머리속에 조금씩 담아두고, 하늘이 보고 싶을 때마다 꺼내어 비춰보고 싶었다. 지금, 조금 더 그 별에 가까이 있을, 언젠가 같이 있게 될 날을 생각하면서, 그 별을 닮은 무언가를 생각해낸다. 그에게 어울리라, 생각하면서, 선 하나를 다시 긋는다.



2월 8일


 눈을 떠보니까 이곳이다. 아까 전 뭔가에 말려 들어가 정신을 잃은 게 마지막이었는데. 눈 앞에 보이는 건... 응? 잡힌 건가? 그 녀석이, 굳이 그 혼란 속에서 날 잡아간 지는 몰라도, 생각해보면 정말 기분이 나빠서 미칠 지경이었다. 젠장, 손은 왜 묶여있어서.

 다행히 입에는 뭘 안 붙여놔서, 뭐라 말할 수는 있었다. 잡아놓을 거면 입, 손, 발을 놔두면 안 된다는 건, 바보라고 만날 듣는 나도 알고 있는 거였다. 설마, 그런 식으로 허점을 드러낼 줄은.

 야! 뒤에서 보이는 녀석을 부른다. 당연히 대답은 없다. 뭘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알 수는 없다. 이 방은 어디에 있는 거지. 기지라면 꽤 넓을 텐데, 만약 어떻게 해서 여길 나간다 해도, 출구가 어디인지는 모르는... 머리가 지끈 아파온다.

 녀석의 관심을 끌 방법이 있나. 뚫린 거라고는 입 밖에 없는데, 그냥 막 소리를 질러대면 될까? 정신을 차리면 어느새 내 입에서는 무슨 이상한 말들이 나오고 있다. 생각나는 대로 막 질러대면서, 저 녀석이 어떤 반응을 보일 지 궁금했다. 재미있게도 녀석은 귀를 틀어막다가 뭐로 막으려고 하기는 커녕, 이쪽으로 와 멱살을 잡는다. 좋았어. 그러면...

 "벌레같은 자식.. 닥치지 못 해?"

 그런 소리를 들으니 뭔가 웃음이 터져나온다. 진짜로, 그 표정이나 목소리가 너무나도 진지해서, 누가 들어도 웃음이 나왔을 것이다. 계속 벌레를 외쳐대는 녀석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 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지금, 너무 웃겨서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얼른 빠져나가기는 해야겠는데...



2월 24일

 오늘따라 켄은 무척 수척해보였다. 이유를 물어봐도 말을 돌리면서, 대답하려 하지 않았다.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었을까, 나는 평소보다 조금 일찍 켄을 돌려보냈다. 밤에, 잠깐 미야코랑 문자를 하다가 오늘이, 켄의 형─이름은 까먹어 버렸다─의 기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걸 모르고 있었냐며 따지는 미야코에게, 네게만 알려준 것 아니냐며 다시 따졌다. 대화가 끝나고, 침대에 누우면서 둘에게 조금 미안하게 군 건 아닐까 생각했지만, 아무도 내게 이유를 알려주지 않은 걸, 내 탓으로 돌릴 수는 없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켄은 죽은 형을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았다. 서로 친했는지는 모르지만, 나와 누나, 아니 누님보다는 훨씬 친했을 것이다. 그 형이라는 사람이 어땠는 지는 몰랐다. 애초에 듣지를 못했던 것 같다. 아니, 알려고 노력하지 않은 걸까.
 어찌보면 켄에게, 그런 걸 집요하게 물어볼 용기가 없었다. 굳이 알지 않아도 될 것 같았고, 알아봤자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아서, 그렇게 신경쓰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하나하나씩 무시해 버리면 언젠가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어지는 게 아닐까 싶었다.
 듣고 싶었던 게 있었다. 너무도 많아서, 그걸 온전히 다 이해할 수 있을 지는 모르겠다. 언제나 켄은, 아픈 게 더 많으니까, 그것들을 조금 나누고 싶었다. 그런 아픔 쯤은 가지고 있어도 될 것 같았다.
 그 사이에는 내가 모르는 너가 있을 것이다. 내가 알아야 하는 뒷모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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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금강포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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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간간히 참여하던 디지몬 전력 60분 연성을 정리했다.


어쩌면 더이상 참여를 하지 않을 것 같아서 미리 정리해본다.



디지몬 전력 60분, 5월 9일, 3주차, 주제 「이시다 야마토石田ヤマト」「안경」중 전자.



 소리가 울렸다. 분명 딴 생각을 하고 있었거나, 아니면 저 소리를 덮는 함성이 조금은 싫었는지도, 앞을 바라보니 다시금 베이스 소리가 들려왔다. 그 거진 소리를 뚫고, 그 저음은 조금은 탁한 목소리와 겹쳐 안을 둥둥 때리고 있었다. 익숙했지만 언제나 그 저음은 쿵쿵 다시 울려왔다.
 "여기서 보는 거는 처음인데 말이야." 타이치는 장난끼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소라는 옆에서, 주먹을 쥔 채 장난스럽게 드럼 흉내를 내는 타이치를 보았다. 사실 타이치는 야마토의 밴드 공연에 거의 찾아온 적이 없는 데도, 마치 지금까지 많이 봐 왔다는 투로 말했다.
 놀랐잖아,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거야? 나는 넌즛이 말했다.
 "맞춰 봐, 적어도 야마토가 첫 소절 부른 시점부터 지금 사이니까!"
 타이치! 하고 뱉어내고 싶었지만 소리들에 묻혀서 들릴리는 만무하고, 으런 패턴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어오던 것이니까. 목까지 차 오른 말을 내리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까 네가 혼잣말 했던 시점.
 "빙고!" 짝, 박수를 치고 타이치는 베시시 웃었다. "이번에는 반응이 다르네. 그런데다 정말 맞춰버리고 말이야."
만날 패턴이 똑같으니까, 이번엔 좀 바꿔 본 것 뿐이야.
 "뭐, 바꾸든 안 바꾸든 똑같으니까 재미없네."
 바보. 들리지 않게 내뱉었지만 타이치는 입모양을 알아차리고 아까 전보다 더 밝게 웃었다. 분명 패턴을 바꾸려고는 했지만 결론은 항상 바보, 한 말로 끝내버렸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오히려 바보는 나였다.

 앞을 보자 다시 소리가 울렸다. 낮은 소리, 맑지 않은 소리가 계속 울렸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타이치가 옆에 있는 지도 잊은 채로 천천히 그 울림을 듣고 있었다. 아까 전부터, 아니, 금방, 아니야 몇 초 전부터 어쩌면 정말로 첫 소절부터, 가슴에 울리는 소리는 점차 커져 타이치가 갑자기 말을 꺼내지 않았으면 정신을 잃을 정도였다. "소라!" 큰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야마토가 노래 할 때 눈을 보면," 타이치는 아까와의 큰 소리와는 다르게, 천천히 말했다. "왠지 좀 슬퍼보이는 것 같아."
 사실, 나는 말했다, 실제로도 슬프게 보이긴 하잖아.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 아까는 몰랐는데 지금 보니까―
 타이치는 갑자기 말을 멈추고 잠시 고개를 숙이더니 쿡쿡 웃기 시작했다. 왜 웃어. 말했지만 타이치는 눈을 감고 계속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가 노래가 끝났는지 함성이 밀려 왔다. 그 순간 타이치는 귀쪽으로 다가와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늘(空), 색(色)이니까."


디지몬 전력 60분, 5월 16일, 4주차, 주제 「막내」「교복」


 이제 소학교에는 저만 남게 되었습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같이 지냈었던 선배들이 없으니 조금은 허전한 마음도 듭니다. 5학년, 지금은 중고등학생이 된 형, 누나들도 이 곳─한 사람은 다른 곳에서─을 거쳐왔겠죠. 소학교에서는 2번째로 나이가 많은 그런 위치에 서 있게 되었지만, 선택받은 아이들 틈 사이로 끼면 머리카락이 헝클어지는 없는 그런 아이가 됩니다. 제가 그 중에서 가장 어린 아이니까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어른이 되어서도 막내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나쁠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연장자라고 하면 뭔가 어른스럽고 무리 안에서 사람들을 이끄는 이미지가 먼저 떠올랐습니다. 조 상과 미야코 상을 처음 만났을 때 조금 놀랐던 건 아마 그런 것 때문이였을 겁니다. 제가 생각했던 어른스러움 하고는 거리가 멀었다고 해야하나요. 두 분이 집 안에서는 막내인 사실은 조금 뒤에 알았습니다. 어쩌면 오랫동안 막내로 지내서 연장자 역할을 어떻게 해야하는 지 잘 몰랐기 때문에 그랬던 건 아니였을까요. 타케루 상이 말했던 6학년의 조 상의 이야기에는 그런 서투른 모습도 연장자로서의 책임을 다하려고 노력했던 모습도 있었습니다. 그 때 타케루 상과 히카리 상은 그 안에서 막내였겠죠. 생각해보니 다이스케 상, 히카리 상, 타케루 상, 이치조지 상도 다 집 안에서는 가장 어린 사람이였죠. 막내라는 위치는 상황에 따라서 다 다른 걸까요.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조 상은 막내지만 제가 볼 때는 6살 위인, 조금은 다가가기 어려운 사람

 형, 누나들이 교복을 입은 모습을 보면 조금은 부럽기도 합니다. 모두가 같은 옷을 입는다는 게 새롭다고 해야하나요. 어쩌면 교복을 입는 것은 조금씩 어른이 될 준비를 하고 있다는 표시일 지도 모릅니다. 조금만 지나면 저도 같은 교복을 입겠지요. 다시 교복을 벗을 때에는 막내 티를 벗어나 같이 어른이 될 수 있을까요.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디지몬 전력 60분, 5월 30일, 6주차, 주제 「고글」「우산」중 전자.


 ...11월 21일, 6부작.
 방송이 끝나자 가슴이 뭉클했다. 작년부터 기다렸던 신작이 올해 나오게 되다니! 일요일마다 설레는 마음으로 TV 앞에 앉아있던 때에서 벌써 몇년이 지난 걸까? 이제는 고등학생이라니... 어떻게 보면 같이 나이를 먹어가는 것인데도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11월 21일이라... 히로카즈랑 켄타랑 붙들고 같이 가 볼까. 아직도 시간만 나면 카드 게임을 하니까. 말하지 않아도 때가 되면 먼저 가자고 말하겠지. 그러고보니 극장에 가 본지도 정말 오래됐구나. <디아블로몬의 역습> 이후로는 처음일 것이다. 정말 모든게 오랜만인걸.
 음... 작년이였을까? 갑자기 뭔가가 나를 깨워서 세계를 구하러 가자고 했을 때 무척 당황했었다. 멍하게 있던 나에게 그것은 다른 차원에 찾아온 위기를, 그 곳에 있는 리얼 월드와 디지털 월드를 지켜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무슨 말 한마디도 꺼내기 전에 그것은 내 손을 잡고 갑자기 열린 틈 사이로 뛰어들었다. 그때 내 손을 잡고 다른 차원으로 끌어들인 것은 무엇이였을까. 디지몬이였을까. 내 차원에서는 볼 수 없는, 카드에도 나오지 않은 디지몬였다. 어쨌든 그쪽에 도착할 때, 11살 때로 돌아간 몸에 흠칫 놀랐다. 그리고 내 옆에는 정말로 익숙하고, 보고 싶었던, 언젠가 만나기를 바랬던 것이 있었다. 길몬. 다시 만날 때는 그러지 않기로 했었는데, 눈물이 나올 뻔해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약한 모습은 보이면 안 되니까. 숨을 크게 들이쉬고, 바라본다. 그 금빛 눈과 마주쳤을 때, 우리 사이에 텔레파시가 흐르는 것 같았다. 분명 길몬도 나랑 같은 방식으로 데려왔을 것이다. 길몬도 알고 있을 거야.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이 사태를 끝내고 나서, 그러고 나서 얘기해도 늦지는 않을 거야.
 신주쿠에서 출발해 최종집결지에 도달했다, 그곳에는, 나와 비슷한, 그렇지만 서로 다른 아이들이 있었다. 그중에는 애니메이션에서 봤던 두 사람─티이치, 다이스케─도 잇었다. 신기한 마음에, 마음 속으로 존경해왔던 두 고글 소년들 앞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올 수 밖에 없었다. "저 두 사람을 동시에 볼 수 있다니!"
 분명 거기에 있던 아이들은 다 고글을 쓰고 있었지. 아니, 한 명은 없었나? 어쨌든, 다른 세계에서 디지몬을 처음 만나고 함께 했던 ,나와 같은 아이들이 차고 있는 고글은, 다들 어떻게 차게 된 걸까? 나는 애니메이션의 그 두 아이처럼 되고 싶어서 무작정 고글을 샀던 것 같다. 혹시 진짜 디지몬을 만날 때, 그것을 끼고 함께 하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길몬을 처음 만났을 때, '테이머'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 사놓았던 고글 덕분이였는지도 모른다.
 불을 켜고, 길몬과 헤어진 이후 다시 상자에 던져놓았던 것이 생각나서, 방 구석에 있는 상자를 뒤졌다. 노란색, 조금 때가 탄 고글에 쌓인 먼지를 털고 목에 건다. 조금 작아진 것 같지만,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고글은 밝은 빛을 내는 것 같았다. 잠깐뿐이였지만, 헤어질 때 참았던 눈물을 터트리고 다시 헤어질 때 분명 약속했다. 다시 만나자고, 이 모습 그대로, 잊지 않겠다고.





디지몬 전력 60분, 6월 13일, 8주차, 주제 「라이벌」「하늘」중 후자

Hammock의 Sora에서.


*
 여름날 오랜만에 나온 산책길, 넷이서 걷는 이 길에 화창한 햇살이 비춘다. 이렇게 넷이 있는 것도 오래됐다. 그동안 멀리 떨어져서, 서로 메시지만 주고 받으면서 보냈던 시간들이 생각난다. 그리운, 다시 밟아보고 싶었던 땅 위에, 그리고, 정말로, 정말로 보고 싶었던, 이 하늘 아래에 있고 싶었을 때, 매일 따뜻한 메시지를 보냈던 소라와 아이들에게, 고마워, 정말 그리웠어.

―하늘을 보려고 고개를 든다

 푸르고, 널직한 하늘에 구름이 떠있다.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고 저 흘러가는, 찬란한 구름을 사랑했던 어떤 시인, 그는 단지 구름만을 사랑했을까. 저 구름 위로 흐르는 푸른색을, 하얀 구름을 푸르고 '찬란하게' 장식하는 하늘을, 그도 좋아하지 않았을까. 하늘은, 그것을 보고 있는 내 눈을 푸르게 물들인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푸른 빛, 어쩌면 처음부터, 평생 하늘을 가득 품으라는 의미로, 내게 가져다 준 것은 아닐까. 언제 그 의미를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어느 순간, 하늘이 내 품 안에 안겼다.
 어쩌면, 그 여름날의 모험에서도, 우리가 미묘한 감정을 가지고 처음 만났던 때에도, 어느 순간 셋이 되었을 때도, 다시 넷이 되었을 때도 하늘은 언제나 푸른빛을 띄고 있었다. 하늘은 평생을 따라오고 있었다. 내 이야기를, 우리의 친구들을, 우리의 아이들을, 그 한결같은 푸른빛으로.
 소라空. 문득 그 말을 입 안에서 되내인다. 붉은 하늘, 검게 어둠이 세상을 덮기 전에, 마지막으로 색을 바꾸던 때. 소라를 볼 때마다, 내 하늘색空色 눈은 그 갈색 눈에 비췄다. 내 눈에는 무엇이 비췄을까. 소라의 눈에서 비췄던 내 눈 안에는 또다른 하늘이, 붉게 물든 하늘이 비추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하늘이 되었던 것은 아닐까. 푸르고, 붉게 물든 하늘을.
 아빠,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란다. 그런 모습에 모두들 미소를 짓는다. 그 밝은 미소, 우리를 닮은 아이들, 서로의 빛을 각각 담은, 또다른 하늘들, 그 미소들에서 본 것은, 그 시인이 말한 찬란한 구름, 하얗고 순수한,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 붉게, 또는 푸르게 빛나는 구름들에 내 얼굴에 또다른 구름을 만들어 낸다.

―따뜻한 햇살,  산책하는 네 하늘들.


 
디지몬 전력 60분, 6월 27일, 9주차, 주제 「문장」「여름」

그 여름날로부터, 벌써 30년이 지났습니다. 이 책이 나온 지도 벌써 5년이 되었군요. 그 책을 탈고할 무렵 계속 읽으면서 발매일 직전까지 수정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에게 2판의 서문을 부탁한 것도 그 때문인지는 모르겠습니다.
 1판이 출간된 이후로 '문장紋章'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았습니다. 아마 타케루 군이 후기에 제 이메일을 써놓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지난 5년 사이에 2000통이 넘는 이메일이 왔습니다. 일일히 다 답장을 줄 수는 없었지만 이 글을 빌어 조금만 적어볼까 합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아니 알아낸 디지털 월드의 문장은 9개입니다. 연구원이 되고 난 후 이 부분을 계속 연구했지만 30년 전의 알려졌던 문장 이외의 다른 문장은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 9개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을 겁니다. 그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 또한 책에서 거의 설명하고 있고요.
 하지만 이 문장이 '선택받은 아이들'에게만 한정된 것이냐는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제게로 온 2000여통의 메일 중 대부분이 이 질문들이였습니다.
 답변이라고 하기에는 그렇지만, 문장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였습니다. 문장은 하나의 표지였습니다.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맞는 문장이 아닌, 자신이 그 문장의 덕목에 맞는 지를 느끼게 하는 신호와도 같습니다. 제 문장은 지식의 문장입니다. 생각해보면 '지식'이 아닌 '호기심'이라고 해야 더 맞는 것 같기는 하지만요. 처음 그 문장을 가졌을 때는 저한테 문장이 맞아 떨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모험을 거치고 나서는 그 '지식'이 저에게 맞는 게 아닌, 제가 성취해야 하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10살의 저는 그저 호기심을 채우는 데만 급급했지만 그때 이후로는 제가 모아놓았던 지식들을, 그저 안으로 가둬놓지 않고 밖으로 퍼트려야 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연구원이 된 것도 그것 때문일 지도 모릅니다.
 모두가 '선택받은' 이 시점에서는 문장이 의미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전 모두가 그 9개의 문장 중 적어도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지하고 있지는 않지만, 마음 속에 숨어있다고 생각합니다. 언제나 옆에 있는, 마음을 나눈 파트너와 함께 말입니다.

 타케루 군은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80년여전 포크너가 쓴 문장文章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마음에 품고 있는 문장은 무엇인가요. 그것이 9개의 문장紋章이든, 어딘가에서 읽었던 문장文章이든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길로 가야할 지 알려줄 수도 있으니까요. 어쩌면 이 책에서 그 두 문장들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선택받은 모두에게.


이즈미 코시로泉光子郎




영광이 사라져도 기억은 남아 있을 것이니, 살과 살을 맞대고 함께할 수 없는 시간이 오더라도 그 순간의 추억만은 간직할 것이었다.

윌리엄 포크너 <곰>




디지몬 전력 60분, 7월 4일, 10주차, 주제 「ヒラリ」「수영복」


 고글의 의미? 아직은 생각 중이야. 처음에는 간단하게만 느꼈는데 생각할수록 복잡해져서 말이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내겐 좀 어려운 것 같아.
 디지몬 헌팅을 하면서 한번도 디지털 월드에 가 본 적은 없었어. 타이키 상이 몇번 얘기해 준 적은 있지만. 디지쿼츠, 아, 너는 잘 모르겠구나. 나중에 다시 말할게. 어쨌든 디지쿼츠로 유출되는 디지몬들을 헌팅하면서 디지털 월드는 어떤 곳일까 종종 생각했어. 타이키 상이 활약했던, 디지쿼츠의 디지몬들이 원래 살고 있었던 곳을.
 쿼츠몬을 퇴치한 이후에도 디지쿼츠의 문제가 심해져서 아무도 디지털 월드에 대해서는 생각을 안했어. 타이키 상도 디지털 월드에 다시 문제가 있을 거라는 생각하지 못했고 나머지 헌터들도 그런 생각은 못했던 것 같아. 그러다가 누군가가 유출원인이 디지털 월드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했어. 그렇다면 누가 디지털 월드에 가서 원인을 파악해야 할 지도 말이야. 그리고, 어쩌다가 내가 가게 되었어. 내가 잘 해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두 세계의 문제가 달린 일이니까, 포기해 버릴 수는 없어!
 지금도 생각해. 디지쿼츠 문제가 해결이 된다면, 모두 각자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지금은 같이 있지만 언젠가는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이번 모험으로 문제가 해결되면 어쩌면 나와 가무드라몬이 함께 하는 것도 마지막이 될 수도 있으니까.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헤어진다고 해도, 인연이 닿으면 언젠가는 만날 수 있을 테니까. 아직 우리 둘은 껌처럼 끈끈하니까 말이야.
 그리고 이 고글, 아까까지도 계속 생각하고 있었어. 타이키 상의 고글. 이건 디지털 월드에 이미 몇번 가봤던 거니까. 힘들 때마다 계속 생각해. 타이키 상을, 이 고글에 담긴 많은 역경들을 말이야. 내가 이 미지의 세계에 발을 딛을 수 있는 것도, 그 의지 때문일 지도 몰라. 내 앞을 막는 것들을, 훌쩍 뛰어넘길 수 있는 용기. 그게 내가 생각하는 의미라도 해도 될까.
 뭐, 나는 이렇게 지내고 있어. 너는 어때? 나랑 너는 많이 닮았다고 생각하는데. 네가 생각하는 의미는 뭐야? 알려주지 않을래?


디지몬 전력 60분, 7월 18일, 12주차, 주제 「키무라 코이치木村 輝一(선우윤)」「화환

전문: http://diamondpotion.tistory.com/6



디지몬 전력 60분, 7월 25일, 13주차, 주제 「디지타마」「장미」중 전자


"이 디지타마들은 하루에 몇번이든지 쓰다듬어야 해. 안 그러면 깨어나는 시간이 엄청나게 늦는다고. 어떤 알은 깜박하고 잊어버렸다니 몇십년? 아니 몇천년인가... 하여튼 그 시간동안 깨어나지 못한 디지몬도 있었어. 그건 왜 물어봐?"
 "그냥, 내가 제대로 알고 있는지 해서."
 에레키몬은 붉은 색 줄무늬를 한 디지타마를 들고 쓰다듬고 있었습니다. 그 디지타마가 꿈틀대자 에레키몬은 다른 디지타마를 들었습니다. 그 앞에 있는 한 소년은 에레키몬이 내려놓은 디지타마를 들었습니다. 손에서 꿈틀대는 것을 느꼈습니다. 또 하나의 생명이, 이미 죽었던 생명이 다시 태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였습니다.
 "너... 아주 예전에 와 본 적 있잖아. 저 파타몬이랑 같이. 그때는 좀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그랬긴 했지만 나 그렇게 나쁜 사, 아니 디지몬은 아니라고! 근데 여기는 왜 또 온 거야?"
 "뭐... 옛날 생각도 나서. 사실은 뭘 쓸 게 있어서 왔어."
 "하여튼... 인간 녀석들은 뭔가를 쓴다고 곳곳을 돌아다닌다니까. 디지몬들은 뭔가를 기록하려고 하지 않아. 어차피 데이터는 남아있으니까 그럴 필요도 없어. 뭐 너희같이 뭐 죽는 걸 기록할 필요도 없어. 모든 디지몬은 이곳으로 다 돌아오게 되니까."
 소년은 주위를 가득 채운 디지타마들을 보았습니다. 제각각의 색깔을 가지고 새로 태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어쩌면 그 디지타마들 각각이 하나의 묘비일지도 모릅니다. 죽은 디지몬들이 남기는 흔적 같은 거일지도 몰랐습니다.
 "어쩌면... 여기는 묘지일 지도 모르네."
 "아니, 요람이라고 해야지. 이 세계에는 '묘지'라는 단어는 쓰지 않는다고. 단지 모든 건 여기로 돌아오는 거야. 나도 죽으면, 디지타마로 다시 태어나서 여기에서 새로 태어나기를, 기다리고 있겠지."
 소년은 생각했습니다. 파타몬이 디지타마가 되었을 때를요. 디지타마를 끌어안고 펑펑 울었었지요. 그때는 파타몬이 그저 죽은 줄만 알았습니다. 그 슬픈 감정은 가슴에 깊히 박혀 끊임없이 마음을 괴롭게 했습니다. 디지몬은 끊임없이 순환한다는 것을, 죽지 않는다는 것을, 슬퍼할 필요가 없음을 알고는 있지만 쉽게 그 감정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영원히 가슴 속에 간직해야 할 지도 모른다고, 소년은 생각했습니다.
 에레키몬은 디지타마를 쓰다듬다가, 다시 소년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근데 너 이름이 뭐였지... 타케루였나... 그래, 타케루! 뭔가 지금 얼굴이 떨떠름한 거 같은데? 내가 말을 제대로 안 했다는 거야?"
 "아니, 그건 아니야. 다만..."
 "다만, 뭐."
 "그냥... "
 타케루는 말끝을 흐렸습니다. 에레키몬은 타케루에게 다가가 말했습니다.
 "어쩌면 내가 제대로 말을 안 한 것 같네. 사실, 이곳에서도 죽는 건 있어. 뭐 너도 알 것 같아서 일부러 말은 안 했는데."
 "뭔데."
 "디지몬이 죽을 때 데이터가 보존되는데 이상하게 그 디지몬의 기억 데이터는 소멸해 버린다고 들은 적이 있어. 근데 그것도 아닌 것 같아. 예전에 어떤 아이의 파트너 디지몬은 안 그랬거든. 잘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디지몬에게 기억이라는 거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거라서 그런 지도 몰라. 다만..."
 에레키몬은 갑자기 말을 흐렸습니다. 평소에는 생각을 별로 하지 않던 에레키몬도 이번만큼은 생각을 해야만 했나 봅니다. 에레키몬은 조용히 말했습니다.
 "다만, 파트너가 있는 디지몬은, 함께 한 시간이 많을수록 기억을 잃지 않은 적이 많았어."



디지몬 전력 60분, 8월 22일, 18주차, 주제 「디지털 월드」「고양이 귀」중 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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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18일

 택시는 꽤 괜찮았다. 낡은 가죽 의자에서는 알 수 없는 옛날 냄새가 났다. 무겁게, 차 전체가 밑으로 축 가라앉은 듯 했다. 택시에 올라탄 지 좀 지났지만, 침묵 뿐이였다. 목적지를 말하지도 않고, 목적지가 어디냐고 묻지도 않았다. 목적지 없는 택시. 손님이 없으면 택시는 이리저리 떠돈다. 목적지가 있어야만, 목적지에 도착해야만 택시는 존재할 수 있다. 히카리는 어디로 가려는 걸까.  분명 히카리는 역까지만 데려다 달라고 했다. 그동안 연락이 안 되던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 지 알 수 없었지만, 그건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닐 거라, 그렇게 생각했다. 가까운 역으로 가 주세요. 목적지를 찾은 택시는 그제야, 침묵을 깨고 달렸다.
 이른 밤, 아니 이제 거의 새벽이였다. 두 시, 이른 시각이였다. 그럼 밤새도록 이야기를 했던 걸까. 옛날 이야기 속에서 한번도 지금 어떤 상황인지 물어보지 않았다. 히카리의 얼굴은 잠이 부족한 듯 어두웠고 목소리마저 축 가라앉아 있었다. 무언가에 쫓기는 듯, 그런 모습에서 왠지 모를 다급함 같은 게 느껴졌다.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겠지. 신경쓰지 않아도 될 거라 믿었다.
 히카리는 잠시 눈을 붙이고 있는 듯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깊게 잠든 듯 고개를 떨구었다. 차가 흔들리자, 몸이 옆쪽으로 쏠리면서 내 어깨 쪽으로 기울어졌다. 어깨 옆으로, 조금씩 들리는 숨소리에 귀기울였다. 입은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듯 계속 움찔거렸다. 꿈이라도 꾸는 듯. 조금 눈을 붙이고, 그런 느낌에 기분이 좋아졌다. 언젠가 느꼈던 따뜻함 같은 것이, 오랜만에 다가온 것 같았다.
 지켜줘. 그런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알 수 없는 잠꼬대 사이에서, 그 말은 명확하게 들렸다. 그 꿈에서, 누구에게 그런 말을 했는 지는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저렇게 꿈 속에서도 두려움에 떨 정도면, 분명 말할 수 없는 일이 있는 것 같았다. 신경쓰지 않겠다고,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제껏 느끼지 못했던 불안감이, 몸을 타고 흘렀다.


 플랫폼 위에서, 방송이 들렸다. 선도 위의 사고로 인해, 다음 열차는 2시간 뒤에 올— 2시간. 금방 헤어질 줄 알았지만, 어쩔 수 없이 기다려야 했다. 이제 가도 된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그의 얼굴이나 행동은.—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가지는 않을 것이였다. 멀리 떨어져서, 그의 시선을 무시한 채 선로 위를 바라보았다.
 아까 택시 안에서 무슨 꿈을 꾸었던 걸까. 어렸을 때와 똑같은 꿈이였다. 검은 실루엣이 나를 뒤쫓는. 그런 꿈은 이제 오래 전에 멈춘 줄 알았지만 지금 다시 등장하고야 말았다. 지켜줘. 내가 그렇게 말했던가. 그 누구도 듣지 않는 공간에서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지켜달라고, 하지만 그 공간에서는 아무도, 아무도 없었다. 옛날 꿈을 꿀 정도로, 이 일이 엄청 심각한 거였을까.
 옆으로 눈을 돌리다,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는 작은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 어쩌면 그럴 일이면 좋겠다. 금방 끝날 일이면, 이 일이 점점 커져 다른 누군가에게 피해를 끼치지만 않았으면 했다. 적어도 그 만큼은. 지켜줄게. 그가 말했다. 그 잠꼬대를 들었는 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미소에는, 전과 비슷한, 예전의 모습이 느껴졌다. 고마워.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해도, 그는, 작은 일에도 머리를 싸매는 사람이니까.


2015년 11월 28일

박스님께 드리는 글.

 신기하다고 해야 할까. 렌즈가 사이에 있을 뿐인데도 이렇게 차이가 클 줄은. 무언가에 갑자기 눈이 뜨인 것처럼 이상한 기분이 맴돌았다.
 언젠가부터 작은 글씨들이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다른 일을 할 때는 별 이상이 없었지만, 유독 글씨를 볼 때마다, 눈앞이 조금씩 흐릿했다. 안경을 맞춰보라는 얘기에도 계속 벼르고 있다가, 어제쯤에야 안경을 맞추게 되었다.
 도수를 좀 높게 맞추었는지는 몰라도, 처음 쓸 때는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금방 익숙해지기는 했지만. 이리저리 안경을 움직이면 흐려졌다가 선명해졌다가, 원래 처음에는 모두 이랬을까. 언젠가 조 상 안경을 몰래 써봤다가 몹시 어지러워서 비틀거렸던 것이 갑자기 생각난다. 그때는 이런 걸 왜 쓸까 했는데. 설마 지금 안경을 낄 줄은 몰랐다.
 원래 새로운 걸 가지게 되면 안 하던 짓도 하는 게 본능이라고 했던가. 잘 보지 않던 신문을 문득 사서 펼쳐보는 것도 그런 본능에서 나온 거인지도 모른다. 요즘도 신문을 보는 사람이 있을까. 어렸을 때는 길거리에서 신문을 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모두가 신문에 눈을 고정하던 것도 기억난다. 신문 대신에 다른 전자기기로 바뀌었을 뿐, 어딘가에 집중하는 것은 똑같지만서도, 차이가 있다면 넘기는 종이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 조금의 차이지만 감각 하나가 몽땅 사라지는 것처럼, 뭔가 허전하기는 했다.
 제대로 보고 있는지 확인하려 그 글자를 일일이 읽는다. 딱딱한 문체가 조금 어색하게 들린다.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말하다' 맞는 걸까, 설마 '해'를 보고 그러는 것은 아닐까, 괜한 생각도 좀 하면서, 열심히 읽고 있는 와중에 누군가 뒤통수를 팍 휘갈긴다.
 "오랜만."
 "갑자기 그렇게 때릴 필요는 없잖아. 다이스케 군."
 목소리만 들어도 벌써부터, 녀석이 오늘 기분이 엄청나게 들떠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래도 뒤통수를 때리는 건 또 뭐람. 뒤를 돌아보자마자 웃음을 팡 터트리는 건 또 뭐고.
 "뭐야, 그건? 안경이야?"
 그렇게 말하면서 다이스케 군은, 신문을 뺏어서 조금 쳐다보다가 다시 내게 넘기고는, 쓰고 있는 안경을 툭툭 건드린다. 그렇게 신기한 것도 아닌데도, 그의 눈은 어디 이상한 골동품을 보는 것마냥 반짝거리는 듯 했다.
 "타케루, 잠깐만 그거 좀 줘 봐."
 "응? 안경?"
 "어, 구경 좀 해 보게."
 안경을 벗어서 주자, 이리저리 살펴보기도 하고 땠다 붙였다 하면서, 처음 보는 물건인 마냥 쳐다보다가 다시 건네준다. 신기하네. 말하면서 옆자리로 날 밀어낸다. 자세를 고쳐 앉고, 숨을 길게 내쉰다. 하얀 입김이 흩어지고 그것을 유심히 바라본다. 옆에서 똑같이 숨을 푸 하고 뱉어내는 것을 우연히 본다. 모른 척 고개를 돌리는 건 예전하고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나저나, 너 안경에 그 털? 뭐냐, 그거까지 쓰고 있으니까 아저씨 같다."
 "에? 아저씨라니. 그거 진심이야?"
 "진심이고말고. 너 옷 못 입는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너도 그렇게 잘 입는 건 아니거든?"
 "그래도 너. 보다는 잘 입거든? 누구 한명 붙잡아서 물어봐. 누가 더 잘 입는 지."
 "아, 못 보던 사이에 장난이 더 는 것 같은데, 다이스케 군?"
 "뭐, 못 보던 사이에 더 패션이 이상해진 것 같은데 타케루?"
 옷이 이상하다니. 전에는 그런 말을 안 했던 것 같다. 그 사이에 보는 눈이 높아진 건지도 모른다. 아니면 원래부터 그랬지만,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이거나.
 어린 시절에 했던 철없는 질문이 생각난다. 안경을 왜 쓰는 거에요? 누구에게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조 상에게 했던가. 언제쯤이였는지는 몰라도, 옷으로 안경을 닦고 있는 와중에 쪼르르 와서 그런 질문을 던졌던 것 같다. 나머지는 다 안 쓰고 있는데 혼자만 안경을 쓰고 있었으니까, 그게 좀 궁금했던 것 같기도 하고, 너무 오래 전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그 답변은 확실히 기억에 남는다.
 안 보이는 것을 보기 위해서 쓰는 거야.
 그때는, 아 그렇구나, 하면서 넘어갔었을 거다. 지금에야 그 대답이 다시 생각나는 건, 아마 지금 내 시야가 흐릿하기 때문일 것이다. 손 안의 안경을 보면서, 새삼 무언가가 머리속을 헤엄친다.
 내가 제대로 보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 사실은 흐릿한 형상일 지도 모른다. 내가 잘못 본 것이 얼마나 많을까 상상해보지만, 그건 알 수가 없다. 누군가를 만나고, 그 사람을 바라보는 데에도, 잘못 판단하고 이해한 것들도 꽤 많을 것이다. 어쩌면 나 자신조차도 제대로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안경을 쓰고 있으면 조금이라도 제대로 볼 수 있을까. 이상한 상상이지만, 정말로 안경을 쓰고 바라본다면, 좀 더 선명하게 누군가를 바라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적어도 비슷해 보이지만 다른 것들은 구별할 수 있지 않을까.
 아직은 모르겠다. 안경을 써봐도 바로 옆에 있는, 다이스케 군이 예전에 내가 보았던 모습과 달라지지 않은 걸 보면 어쩌면 진짜 바보같은 상상을 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런 거와는 관계 없이, 내가 처음부터 온전히 다이스케 군을 바라보고 있었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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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9월 20일


조각글 해시태그로 썼던 것


1.

 새삼스럽게 새소리가, 바람소리가 들렸다. 이전 정말로 끝난 걸까. 들판에 누워 있는 지금도 걱정이 되지만, 이번에는 진짜 끝일 것이다. 갑자기 이곳에 떨어져 몇달 동안 고생한 보람이, 어느정도 느껴졌다. 세상을 구했다고? 내게는 꽤나 거창한 말이었다.
 "사실이잖아! 우리가 세상을 구한 거라고!"
 "에? 뭐, 맞는 말이지만... 실감이 안 나는 걸?"
 당연히, 여기 오기 전까지 악보나 펼쳐놓고 머리나 싸매고 있었으니까... 그 할배 말대로라면 지금쯤 1시간 정도 밖에 안 지났을 것이다. 그 짧은 시간에 엄청난 경험을 했다는 게 상상이 가지 않았다. 지난 10년 동안 경험했던 것보다 더 많았으니까, 더 많은 걸 느끼고, 더 많은 걸 보았으니. 어떻게 뭐라고 해야할 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돌아간 다음에는 뭘 할 거야?"
 "응? 글쎄... 아 참! 내가 원래 노래 만드는 사람이라는 거 말 안 했나?"
 "노래? 나 노래 부르는 거 좋아하는데! 하나 불러줘!"
 "뭐? 지금 생각나는 게 하나도 없는데..."
 "그럼 지금 만들면 되잖아!"
 뭐...? 손사리치면서 못 한다고 발뺌했지만, 그 천진난만한 눈으로 조르는 걸, 어찌 할 수는 없었다. 노래라고? 다시 돌아가면, 이 이야기를 컨셉으로 몇 곡 쓰리라 다짐했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어떻게 할까...
 그러다 문득, 어쩌면 지금 이후로는 다시 만날 수 없을 거라는 게 떠올랐다. 지금까지 함께한 너에게, 고맙다고 한마디도 못 했는 걸...

 네 마음 속에

 어쩌면 마음 속에만 만날 수 있을 지도 모르지만.

 나 살아가네.

 모르겠다. 잘 떠오르지가 않았다. 내 품에 안긴 너에게 어떤 말을 해야할 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노래를 좋아한다고... 너에게 노래를 불러주는 게,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니까.

 난 너를 향해 노래하네.

 새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가 떨렸고, 눈물이 몇방울 떨어졌다.


2.

 「안녕하십니까. 타카이시 씨. 저는 프랑스에 사는 한 청년입니다. 일단 본론부터 말하자면, 제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될 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메일을 일주일 전에 받았다. 프랑스어로 쓰여있었고, 맨 위에는
 '제가 일본어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프랑스어로 적습니다.'
라고 적혀있었다. 기억나는 대로, 조금씩 읽어가면서, 그 청년이 말한 문제가 여간 심각한 적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저는 텐토몬이 파트너입니다. 타카이시 씨 글에 나온 텐토몬처럼, 박식하고 학구열이 높은 디지몬입니다. 며칠 전에 텐토몬이 종이 한 뭉치를 저에게 주었습니다. 자기가 쓴 것이라면서 준 그 종이에는 방대한 양의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일반 사람이 쓴 소설처럼 느낄 정도였습니다. 혹시 다른 글을 배낀 게 아닌가 해서, 제가 다니고 있는 출판사에 이 글을 검토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결국 이 글이 순전히 순수창작이라는 사실만 돌아왔습니다.
 걱정이 되는 건, 이 글이 디지몬 월드를 배경으로 한 게 아닌, 이 곳, 프랑스를 배경으로 했다는 점입니다. 지금까지 디지몬이 문학을 쓴다는 것은 상상도 못 했기에, 이 글을 어떻게 해야할 지 망설여집니디. 타카이시 씨라면 이 부분에 대해 잘 아실 거라 생각하면서, 이 '소설'의 사본을 보냅니다. 저로서는 어떻게 해야할 지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언젠가 일어날 만한 일이 벌어졌구나. 어쩌면 꽤나 심각한 문제였고, 이 문제가 해결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3.

 언제나, 네 눈에서 드높은 하늘을 본다. 이렇게 말한다면 나답지 않다고 그러겠지만, 정말로 그랬다. 날아갈 것만 같은, 파란 하늘이 보인다.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런 푸른 느낌은 언제나 나를 즐겁게 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색으로 색칠된 눈에는, 내가 지금까지 너에게 느꼈던 것과는 다른 깨끗함 같은 게 느껴졌다. 그 깨끗한 눈으로 웃는 네가 생각난다. 처음에는 얄맙다고 생각했지만, 왠지 모르게 같이 따라 웃게 되는...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단순한, 다르게 말하면 좀 생각이 없는 것 같이, 그 눈은 어느 때에나 텅 비어있다고 생각했다. 별 하나 없는 검은 우주처럼, 캄캄한 공간처럼 느껴졌다. 우주. 그 우주가 엄청나게 넓다는 걸 잊고 있었다. 그가 어떤 것이든, 그대로 품고 받아들일 수 있는 건 그 눈 때문이 아닐까. 그 눈 속에 나 또한 담겨있기를 바라는 건, 조금은 무리일까. 아니, 어쩌면 이미 그 안에서 떠다니고 있을 지도 몰랐다.


서로가 무엇을 보고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어도, 그게 기분 나쁜 것이 아니라는 건 똑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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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바일)
원본을 실수로 지워버렸기에, 당시에 생겼던 오타는 수정하지 않았다.
3달 동안은 거의 글을 쓰지 않았다. 짧은 조각글을 몇개 쓰기는 했지만, 거의 쓰지 못했다.
6월은 쓴 것이 없다. 아니면, 내가 써놓고 찾지를 못한 것이거나.

(2016년 1월 24일)

실수로 5월 로그를 지워버렸기에, 같이 올린다.


5월 10일

슬펐다. 아니, 슬픈 감정은 아니였다. 분명 이 감정은 몇 년 전부터 내 심장을 옥죄였고, 지금 이 손끝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려고 할 때에도 계속해서 내 손을 마비시켰다. 키보드에 닿은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화면에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문장 옆에서 검은 세로줄이 깜박이고 있었다. 펜이라도 집어보았지만, 금방 손에 힘이 풀려 툭 하고 바닥에 내려 앉았다.
내려 앉았다. 하얀 깃털과 함께, 귓가에 울리는 잔향과 함께, 둥근 알이....
욱. 헛구역질. 무언가를 뱉어 내고 있었지만 그건 눈에 보이지 않았다. 데비몬, 엔제몬, 끊임없이 사라져 갔던 디지몬들, 위자몬... 파타몬, 카이저, 켄, 어둠......
아-이제야 무엇을 뱉어내고 있었는지 알았다. 기억들, 그것도 기억하기도 싫었지만 어떻게든 적어내야 했던 그런 낡고 어두운 기억들이 바닥 사방에 철푸덕 퍼져 있었다. 버리고 싶어.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저기, 아직 살아나지 못한 문장들을 적기 위해서는 다시금 그 기억들을 떠올려야 했다. 반추反芻, 소는 자기 먹이를 다시 토해내 다시 씹는다고 했지. 기억을 반추하는 소. 그랬었다. 언제나, 항상. 그런 생각이 들자. 정신없이 손으로 바닥을 더듬어 입으로 가져간 후, 씹었다. 손의 떨임이 멈출 때 까지 씹어삼켰다. 기억을 반추하는 사람. 마지막 마침표를 찍을 때 까지는.



타카이시 타케루상 맞으신가요? 만나서 정말 반가워요. 저요? 뭐, 제 이름 이따가 말씀 드릴게요. 저번에 새로 나온 책에 대해 인터뷰하고 싶다는 전화를 했었는데 흥쾌히 승낙해 주셔서 정말 감사하고요. 인터뷰 장소는 여기가 아니고 여기서 한 6분 쯤 걸리는 다른 곳이니 일단은 이동하자고요. 아, 여기 나갈 때 모자를 조심하세요! 어차피 벗으실 거라고요? 뭐, 그냥 쓰시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요. 아니, 아니에요. 뭐 상관은 없지만요.
어렸을 때 타케루상 책을 많이 읽었어요. 네, 뭐 제 나이대면 다 읽어봤을 거에요. 그 때 정말로 책에 나오는 아이들, 그때에나 아이들이지 지금은 다 어른들이니까요. 어쨌든 그 사람들을 다 만나보고 싶었어요. 지금은 그 소망, 아니 그때는 희망이라고 해야 되나요? 하여튼 그 소망을 반쯤을 이룬 거니까요. 아! 죄송해요. 너무 제 얘기만 한 것 같네요. 음, 저 카메라는 무엇이냐고요? 실은 인터넷 신문에도 같이 올릴 예정이라서 특별히 나온 거에요. -상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지금 모습은 잘 모르잖아요. 책에 일부 실린 사진들 때문에 좀 기대가 많은 것 같아요. 뭐, 잘생기셨잖아요, 지금 보니까 말이에요.
음... 표정이 많이 어두우신 것 같네요. 음... 책에서도 타케루상이 웃는 부분은 거의 없었던 것 같은데, 조금 웃어보세요. 너무 숨기지만 말고요. 가끔은 꾹꾹 담아놓는 것 보다는 훨씬 나으니까요. 에... 첫번째 책에서 나온 타케루상 말 중에 이런 게 있었죠? 모두의 희망은 나의 희망이라고요. 지금 제가 다시 말한다면, 타케루상의 웃음은 곧 모두의 웃음이에요. 아, 네. 그러면! 시작할게요.


7월 2일


8월 2일 ​


8월 15일


8월 21일​

 비가 선을 긋고 있었다. 하늘을, 공기를 덮은 줄무늬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 선을 조금씩 바라보다, 조그마한 인기척을 느낀다. 하... 짙은 한숨 소리가 빗소리 사이에서 들렸다. 조금 답답한 마음에, 크게 한숨을 뱉고 싶었지만, 그 소리를 듣기 싫었기에, 입술 사이로 조금씩 숨을 흘렸다.
이렇게까지 다툰 적이 있었을까. 사실, 그렇게까지 크게 싸울 만한 일도 아니었다. 주먹다툼으로 가지는 않았지만, 서로 역정을 내면서, 급기야 입에도 담지 못할 말들을 뱉어냈다. 다툼은 파국으로 치닫고, 결국은 낭떠러지 끝에 서 있게 되었다. 그게 며칠째일까. 서로 없는 사람처럼 대한 게, 그렇게 스치지도 않으려 하다가, 결국 이렇게 되었구나. 비 오는 날, 우산 하나 없이, 단 둘이서. 최악의 상황.
 무거운 침묵 사이로, 죽죽 선을 긋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감고, 먼저 말을 꺼내야 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누가 먼저 나서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그런 생각이, 떨어지는 비의 속도만큼 스쳤다. 그럴때마다, 나는 아니야. 생각하며, 나름대로 선을 그어버렸다.
 가버렸을까. 옆으로 천천히 눈길을 돌리다, 그의 눈과 스치듯 마주쳤다. 찰나의 순간이였지만, 그 눈에 무엇이 담겨있는 지는 볼 수 있었다. 경멸, 아니 그보다는 약한, 차가움. 불안. 그도 내 눈에서 그런 걸 보았을까. 분명 나는 그런 감정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망설이고 있었다.
 젠장. 낮게 뇌리까는 소리를 내뱉고, 그는 비 속으로 달려간다. 달려가다가, 멈추고, 다시 가다가, 멈추고, 몇번을 그렇게 하다, 그는 뒤를 돌아본다. 멀리서, 망설이는 듯한 눈빛이 보였다. 그러다, 시야에서 사라진다,
나는 비를 긋는 걸 선택했다. 그가 달려간 길이, 선처럼 이어진 것 같았다. 이제는 더 많아진 세로줄을 보며, 깨달았다. 비가 긋지 않을 거라는 것을. 그리고 나는 그 선택을, 바꾸기로 했다.
 그가 달려갔던 그 길을 따라, 달려간다. 붙잡아서, 어떻게든 말할 것이다. 무슨 말을 할 것인 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를 붙잡으면, 생각이 나겠지. 적어도 이대로 비를 긋는 것보다는, 그 편이 더 나을 것이다.
 다시는 이러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선을 그어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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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금강포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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