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31일
언젠가 열렸던 켄 오른쪽 합작 때 참여하려고 썼던 것입니다. 그때 주최자 분께서 잠수를 타시는 바람에 다들 합작한 부분을 올렸었지만, 저는 급하게 쓰기도 하였고, 당시에 제대로 글을 쓸 수 없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올리지는 못했었습니다.
지금 글을 정리하다가 한번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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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위로, 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다리 위, 머릿속에서 정리되지 않는 조각조각 끊겨 맞춰지지 않는 생각들을 두고, 조금씩 찬 공기 위로, 타오르지 않는 횃불을 든 동상을 본다. 모습을 본따 세운 여신의 형상. 이 반대쪽에 있는 그것과는 다른, 복사본 하나.
형상 하나를 본다. 누군가를 본따 만든 나의 모습, 그것이 산산히 부서지는 걸, 거울 여러 개가 깨져 그 파편으로 온 몸이 찔리는 것을 본다. 갑자기 그런 악몽을 꾸었다. 긴 잠에 빠져든, 어느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던 시기에는 보이지 않았던 무언가가, 가만히 눈을 감으면 눈앞에 어른거린다. 아무런 소리 없이, 귀가 멎을 듯, 느리게, 아주 천천히 재생되다가 끔찍한 소리와 함께 깨어난다.
꽝
금속성의 소리, 환청인 줄을 알면서도 크게 놀란다. 이제껏 세워 놓은 탑들을 망치로 때릴 때에도 그런 소리가 났었나. 언젠가 그런 적이 있었다. 이유없이, 딱딱한 무언가를 하나 들고 탑을 향해 던진 적이 있었다. 꽝. 그 소리와 함께 들리는 비명소리는 의식하지도 않은 채 그 커다란 공명을 즐겼다. 그때는, 분명 그 모든 소리들을 즐기고 있었다. 햐얗게 울부짖는 소리들이 나를 책망하고, 짖밟는다.
모조리 다시 되돌려 놓을 수 없을까. 그 책임은 전적으로 한쪽을 향해 손가락질한다. 어쩌면 모든 것들이 나, 하나에서 시작되었는지도. 그렇다면, 수습하는 것도 혼자서 해야 할 지도. 이미 다들 알고 있는 지금, 결국 혼자 하는 일은 아니게 되버렸지만서도, 일이 점점 커지는 상황에서, 혼자 감당할 수 있을 지도, 더욱 짙게 그림자가 드리우는 건.
어두웠던 것이 조금은 밝아지고 있다. 벌써 아침인가? 이리저리, 어디까지 걸어온 건지도 알 수 없는데, 얼마나 난간에 몸을 대고, 그 위를 바라본 건 지도 누낄 수 없다. 천천히 부는 바람에 조금은 더 머물고 싶어, 눈을 감는다. 누군가가 어지럽혀 놓은 것 같이, 난잡한 기분.
마침,
—어여.
왠일인지 오늘은 좀 빨리 깨서, 주변이나 돌아볼까 하고 밖에 나왔건만, 마침 지나는 길, 그 다리에서 그 애를 보니 조금은, 반가운 느낌이 든다. 그 애에게서 묘한 기분이 드는 건, 아직은 좀 혼란스러운 기분이 없지 않아 있기 때문일 것이라. 의식하지도 못한 채, 자연스럽게 말을 붙이는 건 괜한 천성 같은 것일 지도.
—여기까진 어쩐 일이야?
말 없는 걸 보면 이유 같은 건 없겠지. 그냥 바람이나 쐬러, 머리가 아프거나, 잊고 싶은 게 있어서. 나도 밖에 나온 이유가 분명 있을 터인데 생각나지 않는 건. 이유 때문이 아니라 어떤, 이상한 이끌림에 뒤떠밀려 막 물을 뿜는 조난자처럼 서 있는 듯, 그 애를 보자하니, 점점 머리가 아파오는 건, 기분 나쁜 기분.
—이번에는 다리 위에서 보는 건가?
그때였나. 합류해달라고 처음 말했던 게. 그 시도가 괜찮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뭐, 무작정 달려들어서 그렇게 말하면 무안할 테니, 다른 아이들 이야기는 듣지도 않고 그랬던 게 잘못된 건지, 나 자신도 녀석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지, 받아들일 수 있을 지. 좀 더 신중했어야 했는데. 언제나 이런 식이였지. 심각해질 지도 모르는 일을 너무도 가볍게 보는 건. 눈 앞에 있는 것 밖에 안 보이는 걸 어찌해야 할 지.
—안 들리는 거야?
뭘 잘못 먹었는지 말해도 듣지를 않는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골똘해진 걸까. 고민이야, 내 것보다는 몇 배 넘게 쌓여 있겠지만, 고민이라고는 별로 해보지도 않은 머리가 그 고민들을, 제대로 느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말할 사람도 없겠지. 언제나 그것들을 아래로, 아래로 쌓고, 곱씹고 있는 것을 상상해본다.
문득, 녀석이 누르고 있는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말해줄 리는 없겠지만, 만약 말해준다 해도, 그 말들을 침묵으로 삭일 수 있을 지 모르지만, 그저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무언가 더 나아지지는 않을 지. 그러면 좀 기분이 후련해질 지.
아직은,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닌 것 같지만.
—야!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옆을 보면, 익숙한, 밝은 얼굴이 보인다. 이번에도 찾아온 건지. 뭔가 떠오르는 게 없어서 가만히, 그 얼굴을 바라만 보았다.
—정신 차리라고. 그렇게 얼빵하게 있지 말고.
그렇게 말하고는, 그 애는 어깨에 손을 올려 토닥인다.
—잘 해보자고.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러고 돌아서는 그에게 말한다.
—모토미야 군.
그 애는 뒤돌아보면서 다시, 말한다.
—나중에 봐. 그때 얘기하자고.
가는 모습을 보면서, 조금은 이야기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직은 때가 아닌 걸까. 내가 그 아이를 믿을 수 있을 지 알 수는 없을까. 정말로, 그 애는 날 믿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만큼 내가 그 애를 실망시키지 않도록 할 수 있을 지.
언젠가는 알 수 있을까.
정말?